1876년 1월 5일 서울 정동에서 전한규와 임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남대문시장 숯장수였던 삼촌(전성여)의 양자로 자랐다. 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 집의 고용인이 되었다가 선교사 가족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개종을 결심하여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1895년 결혼한 부인 조정식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남겼다.
1898년 상동교회 속장 및 권사, 1902년 전도사를 거쳐 1905년 미감리회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고 상동교회를 담임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창설 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만민공동회 연사로 활약했다.
1897년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상동청년회) 창립 회원으로 활약했고 1903년 회장이 된 후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이승만,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이필주 등을 교사로 초빙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05년 멕시코 노동 이민 실태 조사단 파견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상동청년회 주최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한 후 을사조약 반대 도끼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을사오적 척결 무장 투쟁도 후원하였다. 1906년 6월 상동청년학원 기관지 『가뎡잡지』를 발행하고 청년학원 부설 일어야학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07년 해동의숙 설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고 광무사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안창호, 양기탁, 이갑, 이동녕, 이승훈, 이시영, 유동열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헤이그 밀사 파견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순국 자결한 정재홍 의사 장례식에서 기도하였다.
1908년 기호흥학회 찬무원, 국민예복의정회 발기인, 청년학우회 발기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의사부 및 종교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사립 경성고아원 원장으로 취임했다가 3개월 후 한성부에 이양했다.
1911년 3월 인천 내리교회 부흥회 인도 후 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6월 미감리회 연회에서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해 12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2년 4월 번역서 『일일(日日)의 력(力)』(박문사)을 간행했다.
1914년 3월 23일 별세하였다./본문에는 사망 연도가 1914년으로 입력되어 있습니다. 이슈 보고 하였습니다./ 장례식은 3월 28일 상동교회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수철리(현 금호동)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1922년 공옥학교 교정에 ‘전덕기 목사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독립장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