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1941년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1] 신학부를 졸업했다.
강화 흥천교회와 이천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4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서울 감리교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 교수가 되었고 1954~1956년 스위스에 유학하여 바젤대학에서 바르트의 지도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조직 주2과 종교 주3을 강의하였다.
그는 서구 신학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거나 추종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종교 문화, 철학 사상에 견주어 비교 분석, 해석함으로써 한국의 고유한 신학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를 ‘한국적 신학’ 혹은 ‘토착화 신학’이라 명명하였다. 1963년 『사상계』에 발표한 “ 환인 · 환웅 · 주4은 곧 하나님이다”라는 논문을 두고 『기독교사상』을 통해 한국신학대학의 박봉랑, 전경연 교수와 논쟁을 벌였고 1967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한철하 교수, 1973년 장로회신학대학의 이종성 교수, 총신대학의 김의환 교수와 신학 방법론을 둘러싸고 신학 논쟁을 벌였다.
1960년 국제종교사학회 실행위원이 되었고 1970년 한국종교사학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77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여 봉직하던 중 1980년 1월 22일 서울 홍제동 자택에서 뇌내출혈로 별세하였다.
대표적 저술로 기독교 신학과 유교 사상을 비교 분석한 『기독교와 한국사상』(1964), 『한국적 신학: 성(誠)의 신학』(1973), 『효(孝): 서양윤리 · 기독교윤리 · 유교윤리의 비교연구』(1977) 등이 있다. 이외에 『인간학』(1961), 『우리 주변의 종교』(1968), 『칼 바르트』(1968) 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