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부흥강사로 활동하고 예수교회를 창설한 감리교 목사이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후 예수와의 완전 합일을 추구했던 신비주의 부흥운동가였다. 주변에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으며 소속했던 감리교회로부터도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33년 별세 직전 예수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선도감이 되었다.
호는 시무언(是無言).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과 양마리아의 4남 1녀 중 셋째로 출생하였다.
1919년 결혼한 한봉애와의 사이에 1남 영철과 1녀 영숙을 두었으나 딸은 어려서 죽었다.
1909년 토산 한영지서원을 거쳐 1914년 시변리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개성 한영서원 고등부(후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개성경찰서에 2개월 수감되었고, 1920년 2월 기원절사건과 11월 조선독립주비단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21년 3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복학하였지만 11월 워싱턴 군비감축회의에 맞추어 동맹 주1를 주도하고 체포되어 1921년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1924년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감리회신학교의 전신) 영문과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 『아이생활』에 「춘풍」, 「공주와 꽃 팔이」 등 아동 가극을 발표하였다.
1927년 9월 강원도 통천 지역에서 담임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고 1928년 12월 통천교회 새벽 기도 중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환상을 체험한 후 부흥 주6가 되어 강원도와 경기도, 서울, 평양 등지 교회를 순방하며 주7를 인도하였다. 1930년 9월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주8를 받고 전국주일학교연합회 간사가 되었다가 1931년 5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연회 경성지방 순회 전도 목사로 파송을 받아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苦)와 빈(貧)과 비(卑)’를 생활 신조로 삼고 “ 기도(祈禱)와 무언(無言)과 겸비(謙卑)”를 목회 좌표로 삼았던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와의 완전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띠고 있었다. 이런 그의 부흥회 설교가 제도권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세속화되어 가고 있던 제도권 교회에 실망한 젊은 교역자나 평신도들로부터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최태용과 백남용의 주2와 교류하였고 평양과 원산의 백남주, 한준명, 유명화, 이유신, 황국주 등 열광적이고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집단과도 교류했다. 초창기 그를 지지했던 『신앙생활』 발행인 김린서와 김성실 목사 등은 이런 극단적인 신앙 집단과 교류하지 말 것을 주3 그는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라며 거부하였다.
결국 1931년 10월 서울 아현성결교회 집회 중 추방당한 것을 시작으로 1932년 4월 장로교 평양노회가 ‘이용도 목사 주4’을 내렸고, 황해노회와 안주노회에 이어 1933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이용도 목사와 그 주변 인물들을 주5으로 결의했다. 1933년 3월 자신이 속했던 감리교 중부연회에 목사 휴직 청원을 제출하여 수리됨으로 감리교회와도 결별하였다.
신학생 시절부터 앓기 시작한 폐결핵이 악화된 상황에서 1932년 가을부터 백남주, 한준명, 이종현, 박계주 등이 설립한 원산신학산(元山神學山)에 들어가 생활하였다. 1933년 1월 원산 예수교회 설립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6월 예수교회 중앙선도원 초대 선도감(宣道監)으로 추대되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33년 10월 2일 원산 광석동에서 33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사후에 그의 제자 변종호에 의해 『이용도목사 서간집』(1934), 『이용도목사전』(1958), 『이용도 목사 일기』(1966)가 출간되었다. 1998년 10월 기독교대감리회 총회, 1999년 3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에서 ‘이용도 목사 복권’을 결의하였다.
1999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