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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전국주일학교연합회의 간사, 감리교의 경성지방 순회 부흥사 등으로 활동한 목사.
이칭
시무언, 是無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33년 10월 9일
출생지
황해도 금천
정의
일제강점기 전국주일학교연합회의 간사, 감리교의 경성지방 순회 부흥사 등으로 활동한 목사.
개설

호는 시무언(是無言). 황해도 금천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에 입학하고, 3·1운동 때는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도 세 차례나 독립운동을 하여 수감되었다.

출옥 후인 1924년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심한 폐결핵으로 휴학을 거듭하다가 1928년에 졸업하였다. 곧 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도 통천으로 파송되어 목회활동을 하였다.

이 때 기도 중에 성령체험을 하여 신앙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으며 부흥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 전국주일학교연합회의 간사, 1931년 6월에는 감리교의 경성지방 순회 부흥사로 일하였다.

예수에 대한 신비주의적 사랑과 헌신이 주조를 이룬 그의 부흥집회 설교는 대단한 반응을 일으켜 전국 각지에 교회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적 신앙은 기존교회의 의심을 받기 시작하여 1931년 10월 장로교의 황해노회가 그에게 금족령을 시달하였으며, 1932년 4월에는 평양노회가 평양기도단에 제한을 가하여 그를 규제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그가 속해 있던 감리교 경성지방회에 평양노회의 이단문의가 제기되어 중부연회는 1933년 3월 휴직처분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정과 더불어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인하여 휴양차 원산신학산(元山神學山)에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백남주(白南柱)·이호빈(李浩彬)·한준명(韓俊明) 그리고 유명화(劉明花) 등의 신령주의적 신앙생활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곧 이들 집단에 참여하게 되어 같은 해 6월 3일 조선예수교회가 창설될 때 선언문과 교리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 해 10월 9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사상적 핵심은 그리스도와 나와의 합일이라는 강렬한 신비적 일체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어떠한 매개나 중보(仲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 성직자, 교리, 성례전과 같은 통로도 다 무용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사랑과 합일체험의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격 때문에 언어의 한계성을 깊이 느끼게 되었고 시무언이라는 호까지 사용하여 침묵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교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체험내용을 가장 알맞게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애적(性愛的)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하고 자신은 신부라고 말한다거나 포옹·입맞춤·속옷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는 성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특히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장한 사랑은 무한한 무차별의 사랑으로서 차별을 두거나 단계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회주의사상에서조차 배울 것이 있으며 불교와 선교(仙敎)·무교회주의자마저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그가 지닌 동기의 순수성에도 불구하고 기존교회에서 지탄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신앙적 내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신앙태도는 1930년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으며 부흥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는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사후에 변종호(邊宗浩)목사의 편집으로 『이용도목사서간집』(1934)·『이용도목사전』(1958)·『이용도목사의 일기』(1966) 등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신학의 광맥』(류동식, 전망사, 1984)
『일제하감리교회삼대성좌』(송길섭, 성광문화사, 1982)
「이용도의 신비주의연구」(민경배, 『현대와 신학』5, 1969)
집필자
민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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