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국교회가 혼란과 위기에 처한 가운데 민족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 교회 일치를 모색하며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는 취지에서 김인서가 개인잡지로 창간하였다.
당시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큰 시련을 겪는 시기였다. 일제가 교회에까지 주2를 강요하였고, 주3는 서북계와 남부의 세력이 주도권 싸움으로 분열되었고, 장로교회가 이단으로 주5 주6에서도 배척한 적극신앙단이 형성되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공동 사용하던 찬송가를 폐지하였고, 아빙돈 단권주석 번역진에 참여한 인사들이 장로교 총회에서 단죄되는 등 교회 내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런 가운데 김인서는 기독교 잡지 『신앙생활』을 창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강조하는 주7의 신학, 즉 교회일치 신학의 토대 위에서 분열되고 혼란한 한국교회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1932년 1월에 발행된 창간호(제1권 제1호)는 표지에서 ‘축 성탄’을 표기하여 신년호이면서 성탄 기념호임을 보여주고 있다. 표제 ‘신앙생활’ 위에 조금 작은 글자로 ‘그리스도 中心의’를 표기하여 기독교 진리가 내용 구성의 중심이 될 것임을 나타냈다. 창간호부터 제3호까지 첫 글은 ‘宣言’을 제목으로 주9 또는 사설 성격의 글을 싣고 있다. 국한문혼용이고 주10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편집되었다. 분량은 34페이지 안팎이다.
제2호(1932년 2월호)에는 게재된 광고가 눈길을 끈다. 평양 의창모자점을 소개하는데 유료 상업 광고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제3호는 36페이지로 분량이 조금 늘었고, 평안 양화점 광고가 35페이지에 평양통신과 함께 실렸다. 제5호부터는 상업 광고가 없고 알림만 있다.
창간호의 목차를 보면, 宣言, 三綱領(福音信仰, 靈化運動 人和主義), 聖誕說敎, 聖山의 靈啓, 너희는 와서 議論하자, 殉敎者 나붓, 朝鮮의 첫 번大復興會實記, 主의 膝下에서, 옵아듸아書의 硏究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1년 6월호를 46페이지 분량의 주11로 발행하면서 폐간광고를 게재한다. 이후 1951년 7·8월호(합호)를 다시 발행하면서 창간 선언을 한다. 김인서는 10년 전 폐간광고를 했기 때문에 다시 창간한다고 하는 것으로 밝혔으나, 일제의 주13 와중에 폐간에 이르게 된 것을 감안할 때 재창간보다는 실질적으로 주14이란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1956년 제1호(1·2월호)가 34페이지 분량으로 발행되었고, 상업광고는 없다. 1956년 제2호(3·4월호)는 본문은 없고 목차만 주15에서 확인된다. 본문은 보존이 안 된 것으로 추정되며, 1956년 폐간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9월호의 성만찬이 영인본에서 확인되는 마지막 글이다. 당시 3,200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김인서가 이 잡지의 사장이요 편집자, 기자, 사원이 되어 심부름꾼 하나 없이 단독으로 발행하였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하던 시기이면서 한국교회의 분열과 혼란이 심각한 상황에서 정통주의와 주16 입장을 견지하면서 교회 내 주17를 배격하였고, 서서히 밀려들어 오던 자유주의 주18의 물결에 경종을 울렸다. 교회 내의 온갖 주20와 사이비 이단에 대해 예리한 필치로 그것들의 비복음성을 파헤쳐 나갔다. 주21 주22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김인서는 하나님의 서기임을 자처하면서 『신앙생활』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지켜가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