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용은 1935년에 조선의 독자적인 교단인 기독교 조선 복음 교회를 설립하고, 해방 이후 독립촉성 국민회 연락부장, 대한농회 부회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을 역임한 개신교 목사이다. 무교회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교회주의와 영적 기독교론 등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 신앙 혁명을 부르짖으며 개신교회를 각성하려다가 조선 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훗날 우치무라의 사상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였고, 1935년 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정치·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최태용(崔泰瑢)의 호는 시남(是南)이다. 1897년, 함경남도 영흥(永興)에서 태어났다. 1913년, 관리가 되기 위해 수원 농림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곳에서 기독교인이 되면서 기독교 전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918년, 연희전문학교 신학과 2학년에 편입하였다. 연희 전문학교에 잠시 적을 둔 후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영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도쿄에서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인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우치무라의 성서 연구회에서 훗날 복음 주1를 함께 책임지게 될 백남용(白南鎔)을 만났다.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신학부와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신학부에서 청강하였다. 1922년, 『일본에 보낸다』라는 책을 써서 우치무라의 추천서를 받아 1923년에 출판하였다. 동경 대지진을 계기로 1923년 9월에 귀국하였다.
1924년과 1925년, 『신생명(新生命)』에 「제도냐 신앙이냐」, 「사업인가 생명인가」 등의 글을 발표하면서 기성 교회에 대한 개혁 의지를 피력하였다.
1925년 6월, 『천래지성(天來之聲)』이라는 개인 잡지를 발간하고, 같은 해 12월, 기독교 주2 강당에서 「신앙혁명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독립 전도를 하면서 ‘신앙 혁명’을 외쳤고, 1926년에는 ‘비교회주의’를 주장하였다. 1927년에 『천래지성』을 폐간하고, 1929년 1월에 『영과 진리』를 발행하였고, 그곳에 「영적 기독교」를 연재하였다. 다시 유학하여 일본 신학교에서 「제4복음서의 구원관」이라는 논문을 쓰고 1932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조선 교회의 신앙을 혁명하려 했지만 1932년 12월, 『기독신보(基督申報)』로부터 주3의 무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3년, ‘조선신학숙’을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서구 교회로부터 정치적 · 경제적 · 사상적으로 독립한 조선 교회를 설립하고 싶은 평소의 바람대로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복음교회의 표어는 “一.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二.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三.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였다. 1942년, 친일 잡지인 『동양지광(東洋之光)』에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정치 ·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1946년 중반부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민 주4을 벌였다. 1949년에 대한농회 부회장, 1950년에 대한농민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납북되거나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1월, 복음교회는 교단적 차원에서 최태용의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적을 회개하였다. 복음교회는 한국의 독립 교회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한국기독교교협회의회(NCCK)에 가입하고 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 개신교계에 안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