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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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인물
1935년, 조선의 독자적인 교단인 기독교 조선 복음교회를 설립하고, 해방 이후 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연락 부장, 대한농회 부회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을 역임한 개신교 목사.
이칭
시남(是南)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50년
출생지
함경남도 영흥
주요 저서
『일본에 보낸다』(1923), 『천래지성』(1925), 『조선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1929), 『영과 진리』(1929) 등
주요 작품
「제도냐 신앙이냐」(1924), 「사업인가 생명인가」(1925), 「비교회주의」(1926), 「영적 기독교」(1929), 「신 국가관」(1947) 등
주요 경력
기독교 조선복음교회 감독, 독립촉성국민회 연락부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
관련 사건
6·25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최태용은 1935년에 조선의 독자적인 교단인 기독교 조선 복음 교회를 설립하고, 해방 이후 독립촉성 국민회 연락부장, 대한농회 부회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을 역임한 개신교 목사이다. 무교회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교회주의와 영적 기독교론 등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 신앙 혁명을 부르짖으며 개신교회를 각성하려다가 조선 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훗날 우치무라의 사상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였고, 1935년 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정치·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정의
1935년, 조선의 독자적인 교단인 기독교 조선 복음교회를 설립하고, 해방 이후 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연락 부장, 대한농회 부회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을 역임한 개신교 목사.
인적 사항

최태용(崔泰瑢)의 호는 시남(是南)이다. 1897년, 함경남도 영흥(永興)에서 태어났다. 1913년, 관리가 되기 위해 수원 농림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곳에서 기독교인이 되면서 기독교 전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주요 활동

1918년, 연희전문학교 신학과 2학년에 편입하였다. 연희 전문학교에 잠시 적을 둔 후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영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도쿄에서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인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우치무라의 성서 연구회에서 훗날 복음 주1를 함께 책임지게 될 백남용(白南鎔)을 만났다.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신학부와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신학부에서 청강하였다. 1922년, 『일본에 보낸다』라는 책을 써서 우치무라의 추천서를 받아 1923년에 출판하였다. 동경 대지진을 계기로 1923년 9월에 귀국하였다.

1924년과 1925년, 『신생명(新生命)』에 「제도냐 신앙이냐」, 「사업인가 생명인가」 등의 글을 발표하면서 기성 교회에 대한 개혁 의지를 피력하였다.

1925년 6월, 『천래지성(天來之聲)』이라는 개인 잡지를 발간하고, 같은 해 12월, 기독교 주2 강당에서 「신앙혁명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독립 전도를 하면서 ‘신앙 혁명’을 외쳤고, 1926년에는 ‘비교회주의’를 주장하였다. 1927년에 『천래지성』을 폐간하고, 1929년 1월에 『영과 진리』를 발행하였고, 그곳에 「영적 기독교」를 연재하였다. 다시 유학하여 일본 신학교에서 「제4복음서의 구원관」이라는 논문을 쓰고 1932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조선 교회의 신앙을 혁명하려 했지만 1932년 12월, 『기독신보(基督申報)』로부터 주3의 무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3년, ‘조선신학숙’을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서구 교회로부터 정치적 · 경제적 · 사상적으로 독립한 조선 교회를 설립하고 싶은 평소의 바람대로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복음교회의 표어는 “一.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二.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三.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였다. 1942년, 친일 잡지인 『동양지광(東洋之光)』에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정치 ·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1946년 중반부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민 주4을 벌였다. 1949년에 대한농회 부회장, 1950년에 대한농민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납북되거나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1월, 복음교회는 교단적 차원에서 최태용의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적을 회개하였다. 복음교회는 한국의 독립 교회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한국기독교교협회의회(NCCK)에 가입하고 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 개신교계에 안착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신학위원회 편,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5)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신학위원회 편, 『최태용 전집』 (꿈꾸는터, 2009)
전병호, 『최태용의 생애와 사상』 (성서교재간행사, 1983)
한영제 편, 『한국기독교인물 100년』 (기독교문사, 1987)

논문

전인수, 「1920-30년대 조선적 기독교 운동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전인수, 「최태용의 조선적 기독교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 3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3)
지동식, 「최태용의 시, 평론, 신학」 (『현대와 신학』 6-1,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70)
주석
주1

복음주의에 입각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 특히 독일의 루터파 교회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2

기독교에 바탕을 둔 국제적인 청년 운동 단체. 1844년에 윌리엄스(Williams, G.)가 영국에서 창립하여 이후 전 세계로 퍼졌으며, 인격 향상과 봉사 정신에 의한 사회 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말샘

주3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 왕비가 된 후 바알의 제사장을 끌어들여 숭배를 강요하다가, 갈멜 산에서 여호와의 예언자인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패하였다. 우리말샘

주4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대다수 국민이 참여하는 활동.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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