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남 갑산 출신이며, ‘예수교회’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대종교의 진리를 추구했으며, 3‧1운동 때 감시를 피하려고 서당 선생을 주1. 기독교로 개종하여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26년에는 학우들과 신앙 집회를 열기도 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평양신학교 3대 천재 중 하나로 불렸다. 일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 연구’ 독자였다. 193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원산 마르다윌슨 여자성경학원에서 가르쳤다. 인도의 선다싱(Sundar Singh)과 스웨덴의 스웨덴보리(Emanuel Swedenborg)의 사상을 좋아했다.
1930년대 한국기독교의 특징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기독교 유형과 일제의 식민주의 정신 침략을 넘어서는 복음적이고 영적이고 주체적인 기독교 패러다임 창출의 모험에 있다. 성서조선운동, 복음교회운동, 예수교회운동 등이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백남주는 1931년 한준명(韓俊明), 이용도(李龍道)와 교류했고, 1932년 여름 『새 생명의 길』을 출판했다.
1933년 1월 3일 새벽 그의 집 집회에서 ‘예수교회’의 출발이 있었고, 같은 해 6월 평양에서 첫 예수교회공의회가 열렸다. 예수교회 창립 주3 3인 중 한 사람으로 창립 선언과 신전을 작성했고, 원산 예배당 목사와 원산신학산 수도감으로 일하며 『예수』 지에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요한복음을 번역해서 실었다. 1934년 가을 예수교회를 떠났다.
1935년 평북 철산에서 김성도(金聖道)와 성주교단(聖主敎團)에 의해 주2. 1946년 월남하여 공주사범학교에서 백상조(白祥朝)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영적 통찰력, 문화사에 대한 이해, 원어 성경 공부로 유명했다. 흰밥 짓는 솜씨가 뛰어나 밥의 예술가 같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