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명천 출신. 이용익(李容翊)의 손자이며, 이현재(李賢在)의 아들이다.
1907년에 보성학교(普成學校: 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인 할아버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보성학교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당시 일제통감부는 학부(學部)를 통하여 보성학교를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학교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으나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안중근사건(安重根事件)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함께 붙잡히기도 하였다.
한편, 1907년 1월에는 이준(李儁)·이동휘(李東輝) 등 함경도유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速成師範科)를 설치하여 소학교교원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한북흥학회가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합동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칭하면서 두 학회가 경영하던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종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밖에도 강화 보창학교(普昌學校)와 청주 보성학교(普成學校) 등을 사재로 경영하고, 안창호를 도와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의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통하여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의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근대교육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 후 보성학교의 경영을 천도교로 인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권업회(勸業會)를 조직,『권업신문』을 발행하고 4개처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갔다가 1917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귀국, 고향인 명천에서 1년간 거주제한을 받았다. 1918년에 상경하여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