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

선사문화
개념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와 같이 문헌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대.
이칭
이칭
원사(proto-history)시대
내용 요약

선사시대는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와 같이 문헌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다. 세계 각지에서 문헌 기록의 등장은 다르고, 기록된 역사도 약 5천 전부터 시작해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흔히 문자의 유무를 기준으로 선사시대를 나누지만, 문자가 있어도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하면 선사시대나 다름이 없으며, 이용할 수 있는 문헌 기록이 드물다. 이 경우 원초적 역사시대라는 뜻을 지닌 원사(proto-history)시대라는 개념을 쓰기도 한다.

정의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와 같이 문헌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대.
개설

문헌 기록의 유무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면, 유럽인이 마주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은 역사 없는 선사시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유럽인은 그런 관념에서 원주민을 대하였다. 이는 유럽인이 들어와서야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그만큼 문자의 유무란 개념은 모호하기도 하고, 편향된 기준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를 사람의 연원과 지내온 내력이라고 한다면 선사시대도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문자를 사용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고조선 기사를 보면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미 역사시대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요동이나 한반도 북부와는 달리 이 시기 한반도 남부는 원삼국시대가 시작되기까지 선사시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창원 다호리 고분 발굴에서는 길이 23㎝가량의 붓 다섯 점이 나왔다. 붓털은 양단에 끼워져 있어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같이 수습된 손칼 역시 나무에 글씨를 쓰고 지우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호리 고분은 서력 기원 전후의 무덤인데, 이때가 되면 한반도 남부에서도 문자를 썼고, 그렇게 역사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의 인지와 고고학의 성장

고고학은 성경을 포함한 그 어떤 문헌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인간의 과거를 인지하고, 그 시대의 유물과 남은 흔적을 연구함으로써 학문으로 성장한다. 인간의 과거가 성서의 기록을 넘어 먼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새로이 등장한 고고 자료와 동물 뼈로 점점 분명해졌다.

19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의 여러 곳에서 매머드와 같은 멸종된 동물의 뼈와 함께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다. 나아가 덴마크 크리스티안 톰센(Christian Thomsen)은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라는 삼 시대 체계의 선사시대 편년을 확립해 박물관에 유물을 전시하였다. 이 편년 체계는 층위 발굴을 통해서 검증되었고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이 발간되면서 인류의 진화와 선사시대의 시간은 더 길어졌다. 존 러복(John Lubbock)이 1865년 발간한 『선사시대(Pre-historic Times)』는 선사시대라는 개념을 지식인과 대중에게 널리 확산시켰다. 이 책에서는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로 구분했는데, 이렇게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의 네 시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의 선사시대 서술에 일반 용어가 되었다.

구석기시대 문화 변화 개괄

선사시대는 인문학의 맥락을 넘어 지질 시대와 생물 진화의 역사를 서술할 때도 쓰이지만, 흔히 인간이 남긴 맨 첫 흔적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이로부터 구석기시대가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대략 11,700년 전 플라이스토세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선사시대는 약 600~700만 년 전 침팬지와 분지한 시점부터 셈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과거 유적과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에서는 흔히 약 330만 년 전 인간이 남긴 도구의 등장을 기점으로 잡는다.

에티오피아의 고나(Gona)에서는 뗀석기 수백 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약 260만 년 전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플라이스토세의 시작과 어울릴 뿐 아니라 호모 속(genus Homo)의 등장과 진화와도 맞물린다.

이렇게 시작된 구석기시대는 아프리카와 유럽의 고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전기와 중기, 후기로 나눈다.

전기 구석기시대에는 자갈돌을 소재로 한 찍개와 다면구, 몸돌, 격지떼기 등이 특징인 올도완(Oldowan) 전통과 이를 뒤이은,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를 표지로 하는 아슐리안(Acheulean) 전통이 있다.

격지를 소재로 한 수많은 잔손질 도구와 르발루아(Levallois)라 불리는 준비된 몸돌 기술이 특징인 무스테리안(Mousterian) 전통은 중기 구석기시대 석기 기술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70만 년 전이란 설도 있지만, 고고학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파주 장산리와 연천 전곡리, 단양 금굴, 청원 만수리 등지에서 주먹도끼와 찍개 같은 유물의 사례가 초기 점유의 흔적일 것이고, 장산리와 금굴에서 19만~23만 년 전의 연대측정 결과가 알려지기도 하였다.

주먹도끼, 찍개, 다면구 등이 중심인 이른 구석기시대가 시작되고, 약 4만 년 즈음 현생인류의 확산과 더불어 후기 구석기시대의 문화가 이어진다.

길이가 너비보다 두 배 이상 큰 돌날을 만드는 기법이 체계화되었으며, 이 돌날을 잔손질해 밀개와 새기개, 뚜르개 같은 여러 도구도 만들어 썼다. 이와 함께 뼈와 뿔을 손질한 도구[골각기]가 중요해졌다. 현생인류는 조개껍데기 같은 장식물을 만들어 치장했으며, 동굴벽화를 비롯해 훌륭한 예술품을 남겼다.

한국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은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매우 많이 알려져 있다. 이때의 수렵채집민은 규질응회암과 셰일[혈암], 그리고 흑요석 같은 매우 정질의 암석을 사용해 돌날, 그리고 이보다 훨씬 작은 잔돌날, 밀개, 새기개 같은 정교한 석기를 만들고 사용하였다.

특히 흑요석은 백두산 근처가 원산지라고 하는데, 중부지방 유적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으며, 남부지방에서도 적지만 나온다. 아마도 이동하는 수렵 채집 생활의 맥락에서 여러 직간접 교류의 결과 먼 곳의 돌감까지 얻게 되었을 것이다.

현생인류의 가장 큰 성취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매우 다양한 환경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약 6만 년 전이면 아프리카를 벗어나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동하였다. 약 2만 년 전 추운 빙하기에 이미 고위도 환경에 적응하였으며, 빙하가 녹을 때 즈음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입하여 남아메리카 끝까지 도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 세계로 확산한 현생인류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수렵과 채집을 이어가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새로운 대안을 찾기도 한다. 플라이스토세의 끝과 더불어 시작된 지구 온난화를 맞아 새로운 식물을 가꾸고, 동물을 사육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시대 이후의 문화 변화

일반적으로 신석기 혁명이란 개념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나서 수렵채집민이 마을을 이루고 정주하면서 씨를 뿌려 가꾸고, 동물을 기르고, 간석기토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이런 모든 변화가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한꺼번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신석기시대의 시작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개념 정의 역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이스토세가 끝난 뒤에도 수렵채집 생활이 지속된 상당한 시기를 중석기시대라 부른다. 반면 서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정주 마을의 등장은 플라이스토세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야생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토기의 등장은 그 이후의 일이다.

한편 세계에서 토기가 가장 먼저 쓰인 곳은 동아시아다. 최후 빙하 극성기(Last Glacial Maximum)가 끝나고 기온이 상승하면서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일본 곳곳의 수렵채집민은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한국에서는 아직 플라이스토세 말기의 토기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게 토기는 수렵채집 생활의 맥락에서 등장하고 쓰였다.

동아시아에서 농경은 약 8000년 전 즈음 기장과 벼가 재배되면서 시작했고, 한국을 비롯한 극동 지역에 퍼졌다. 한국 신석기시대 주민의 주된 생업은 사실 수렵과 채집이었다. 가장 이른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에서 나왔으며, 서기전 6500년 즈음 동해안과 남해안의 여러 유적에서 해양자원을 이용한 신석기시대 패총이 등장하였다.

인천 운서동과 화성 석교리 등지의 발굴로 상당한 규모의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드러났다. 빗살무늬(즐문)토기와 함께 각종 석기가 수습되었고, 조와 기장을 재배한 흔적도 알려졌다. 신석기시대 중기의 주민은 내륙으로 확산해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유적의 수는 다시 줄어들고 소규모 주거 유적이나 패총이 늘어나는 양상이다.

서기전 15~13세기 즈음 남한 지역에서는 강안 또는 산록과 구릉 정상부에 청동기시대 마을이 들어선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민무늬(무문)토기와 각종 간석기를 사용했지만, 청동 유물을 본격적으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는 서기전 13~11세기의 청동 유물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남한의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는 송국리 유형의 확산이 가장 큰 특징이다. 송국리 유형에서는 논농사가 본격화한 특징이 있으며, 환호를 두른 마을이나 여러 형식의 고인돌과 무덤 및 부장품에서 보듯이 사회 위계화가 진전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4세기 즈음 몇 유적에서는 기존 청동 유물에 주조철부와 같은 새로운 유물이 등장하면서 초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서기전 1세기부터 역사시대인 원삼국시대에 들어선다.

선사시대의 의의

선사시대는 어떤 문헌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까마득히 먼 과거이다. 다만 석기나 토기와 같은 고고학 유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역사시대와 선사시대는 편의적인 구분일 뿐 역사시대는 선사시대의 연장선 위에 있다. 정주 농경마을과 하늘 높이 피라미드를 세운 도시문명,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같은 정치체는 사실 기존 선사시대의 문화 토대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 강의』(사회평론, 2010)
김범철 · 성춘택 · 천선행, 『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중앙문화재연구원 · 진인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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