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 ()

건축
유적
문화재
나주시의 중심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읍성.
이칭
이칭
나주성(羅州城)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초기(1404년, 태종 4)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나주목사 김계희
높이
270cm
둘레
940m
면적
58,982㎡
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2-20 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0년 10월 31일 지정)
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2-20번지 외
내용 요약

나주읍성은 고려 후기 토성으로 세워져 조선 시대까지 총 4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진 성곽이다. 나주읍성은 객사가 있는 성북동 일대를 중심으로 확장되고 이후 동측과 북측으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현재 동·서·북 문지 일대와 금성관 일대 조사 결과,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나주읍성은 고려 후기에 토성으로 만들어져 조선 시대 때 석축성으로 변화하면서 크게 증축되었다.

정의
나주시의 중심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읍성.
연혁

현재의 나주읍성 이전에 나주성(羅州城)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金慶孫)조(1237년, 고종 24)에 나주성(羅州城), 성문, 주7 등이 언급되고, 우왕 1년(1375) 정도전이 유배 길에 나주성 안에 있는 동루(東樓)에 오른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나주성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주성이 주8이었으며 조선 초기 규모가 작아 넓게 증축해야 한다는 점이 거론된 것을 보면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나주읍성은 ‘나주와 보성에 성을 축조하였다’는 『태종실록』 4년 10월 1일조의 기록으로 보아 1404년에 토성을 석축성으로 개축 혹은 토성과는 다른 주9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읍성의 규모가 작아 여러 차례 증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나주 목사 김계희(金係熙, 재임기간 1457∼1459)에 의해 증축이 이루어졌다. 그는 성과 문루를 증축했는데 옛 성터는 성 안에 있었다고 했다. 1550년(명종 5)과 1555년(명종 10)에 폭우가 쏟아져 서성과 동성의 수구로 물이 몰아쳐서 읍성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가 났으며, 뒤이어 임진왜란 때 나주읍성이 함락되어 1599년(선조 32)에 보수가 이루어졌다.

선조 이후 이 읍성에 대한 직접적인 문헌 자료는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여러 문헌에 나주읍성의 규모가 1,162보(步), 3,126척(尺), 5,320척(尺), 9,966척(尺) 등으로 보이기 때문에 4차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 때 국도 1호선 개설, 나주-목포 간 철도 개설, 나주 경찰서 건립 등으로 성벽이 많이 파괴되었다. 나주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남고문(南顧門),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 영금문), 북망문(北望門)을 설치하였는데 오늘날 이들은 모두 복원되어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나주읍성은 대부분 객사동헌, 문지를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왔으며, 부분적으로 체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성벽은 조선 시대 석축 성벽과 더불어 내벽에 주10 석렬이 있는 고려시대 주12 토성이 함께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석축 성벽의 지반은 자갈돌과 점토를 섞어 단단하게 다졌고, 그 위에 윗면을 다듬어 기단석을 놓았다. 기단석에서 10∼30㎝ 정도 들여서 체성의 면석을 수직으로 쌓았는데 상부로 가면서 면석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면석 사이에 잔돌을 끼워 각 단의 수평을 맞추었다. 나주읍성은 편축식인데 그 너비는 560㎝ 내외이며, 성벽 안쪽 일부는 작은 돌로 채워 넣은 후 흙으로 성토하였다.

고려시대 토성은 근대 건축물과 기타 부대 시설에 의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으나, 판축 기법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노출된 토성은 기저부 한쪽에 석열을 배치한 후 점토를 번갈아 쌓아 올린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졌고, 구간에 따라 판축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토축 성벽의 기단 석렬은 조선시대 읍성 내벽 하단부로부터 70㎝ 정도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기단 석렬은 1단 1열로, 석재의 크기는 길이 30㎝, 너비 20㎝ 내외이다.

나주읍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지를 제외한 3곳의 문지가 조사되어 출입 시설과 성벽의 일부, 주14 시설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기단석 등이 확인되었다. 서문지는 2차에 걸쳐 지어졌는데 후대의 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누각으로 추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사진 자료가 남아 있는 동문은 육축 시설 위에 2층 누각이 있고 주4 형식의 출입문이 있었다.

3곳에 있었던 옹성은 반원형 편문식이며,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모를 죽인 ㄱ자형으로 조선 전기의 옹성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북문지에서는 성벽, 문지, 옹성 그리고 옹성에서 390~750cm 떨어진 곳에서 해자가 확인되었다. 해자는 2차에 걸쳐 지어졌는데 2차 해자의 내벽 석축은 4단 정도 남아 있다. 바닥에서는 목익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읍성 내부에서 3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 객사인 금성관이 주목된다. 조선 전기에는 주15과 양익헌을 갖춘 객사였는데 조선 후기에 대규모의 정청인 현 금성관(錦城館)이 재건립되고 동익헌지, 서익헌지, 주16 시설, 중문, 각종 부속 건물지와 주17 등이 건립되었다. 전기와 다른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보인다.

나주읍성에서는 백제 토기편부터 근대의 유물들이 층위와 관련없이 출토되었으며, 청자는 12세기 상감 주18가 주를 이루고 일부 주6의 초기 청자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삼봉집(三峯集)』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금성일기』
『나주읍지』
『증보문헌비고』

단행본

『나주읍성 동문지』(호남문화재연구원, 2003)
『나주읍성Ⅱ』(호남문화재연구원, 2004)
『금성관』(동신대학교박물관, 2008)
『나주읍성』동신대학교박물관, 2010)
『나주 역사문화환경 관리계획 시범사업 연구용역 보고서』(나주시, 2015)
『나주읍성 북문지』(영해문화유산연구원, 2017)
『나주읍성 서성벽』(대한문화재연구원, 2018)
『금성관 Ⅱ』(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2019)
『나주목 동헌터』(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 2021)

논문

이경찬, 「조선후기 나주읍성의 도시형태 형성과정 해석」(『대한건축학회논문집』 31집, 대한건축학회, 2015)
이수진, 「조선시대 읍성 연구」(목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김종순, 「나주 읍성권역 문화유산의 복원과 활용」(목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
정명훈, 「스페이스 신택스(Space Syntax)를 활용한 나주읍성 확장양상에 관한 고찰」(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
주석
주1

평지에 둘러쌓은 성. 고구려의 요동성,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2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3

사방 정계에서, 좌우 축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우리말샘

주5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6

가운데는 둥근 해를, 그 주변의 둥글고 두툼한 띠는 햇무리 형태를 하고 있는 도자기의 굽. 7세기 중국 저장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9~10세기경 우리나라 초기 청자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말샘

주7

아래위로 여닫게 되어 있는 문. 우리말샘

주8

흙으로 쌓아 올린 성루. 우리말샘

주9

돌로 쌓은 성. 우리말샘

주10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우리말샘

주11

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일. 또는 그 판자와 공이. 우리말샘

주12

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일. 또는 그 판자와 공이. 우리말샘

주13

돌을 다듬음. 우리말샘

주14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5

정치나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를 보는 관청. 우리말샘

주16

보행자의 통행에 사용하도록 된 도로. 우리말샘

주17

바깥 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우리말샘

주18

상감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넣은 청자. 우리말샘

집필자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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