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산(德山). 1392년(태조 1) 4월에 생원이 된 뒤, 10여년 동안 신흥왕조 건설에 참여하여 공로를 인정받았다. 1402년(태종 2) 오랫동안 병서를 연구한 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낮은 벼슬을 하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성격이었다. 1419년(세종 1) 처음으로 경기도수군첨절제사로 외직을 맡은 이후, 40대 후반의 원숙한 경험과 의욕을 토대로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여 경상우도병마도절제사와 상호군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함길도병마도절제사 등을 맡아서 국방안보에 주력하였다.
능력이 인정되어 1429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외교적인 임무수행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왕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 뒤 1432년에는 59세로서 강계절제사가 되어 파저강(婆猪江)일대에서 변환(邊患)을 야기하던 야인들의 마을을 정벌하고 그 일대에 조선의 국력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434년 평안도절제사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436년에는 야인의 기습공격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하여 결성지역으로 귀양간 일도 있었다. 65세 때인 1438년에 또다시 무공이 인정되어 경상좌도처치사와 전라도처치사를 역임하였다. 1443년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