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과는 고려시대 이후 승려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과거이다. 고려 광종 때에 과거제를 창설할 때 마련되었다. 교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禪宗選)이 있었다. 승과 합격자에게는 대선(大選)이라는 법계(法階)가 주어졌고,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서로 승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억불숭유정책이 강화되면서 중종 때에 폐지되었다가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재개되었으나 다시 폐지되었다. 승과에 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조선 말기까지 변동 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선(禪宗選)의 두 종류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승과가 처음 생긴 것은 고려 광종 때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즉, 광종이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958년(광종 9)에 관리 등용책의 하나로서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를 주축으로 하는 과거제를 창설했을 때 승과제도도 함께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기사가 『고려사』 · 『고려사절요』에는 없다. 그러나 최충(崔沖)이 지은 원주 거돈사(居頓寺) 원공법사비(圓空法師碑)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고려사』 세가(世家) 선종 1년(1084)조를 보면, 이 해에 보제사(普濟寺)의 중 정쌍(貞雙) 등이 국왕에 건의, 승과도 진사과와 마찬가지로 삼년일선(三年一選), 즉 3년에 한 차례씩 실시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종전에는 비정규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이 이 때에 와서 식년제(式年制)로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이 그 뒤 얼마만큼 제대로 실시되었는지, 또 고려시대를 통해 몇 회에 걸쳐 승과가 실시되었고 모두 몇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려시대의 승과에는 불교 자체에 교종과 선종의 두 갈래가 있었던 만큼, 교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과 선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의 두 종류가 있었다. 교종선은 교종의 도회소(都會所)인 개성의 왕륜사(王輪寺)에서, 그리고 선종선은 선종의 도회소인 개성의 광명사(廣明寺)에서 각각 실시하였다.
승과 합격자에게는 교종 · 선종의 구별없이 대선(大選)이라는 법계(法階 : 승려들에게 주어지는 품계)가 주어졌다. 이 대선을 시발로 하여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으로 승진할 수가 있었다. 그 위로 교종계에서는 수좌(首座) · 승통(僧統), 선종계에서는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의 법계가 있었다.
그리고 승통 또는 대선사에서 다시 오를 수 있는 지위는 국사(國師) · 왕사(王師)였는데 여기에는 교종 · 선종의 구별이 없었다. 이는 승려가 국가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예직이었다.
고려시대 승과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교종선과 선종선으로 나뉘어 3년마다 실시되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도승조(度僧條)에 “선교양종이 3년마다 시험을 실시하되 선종에서는 『전등록(傳燈錄)』과 『점송(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과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시험해 각각 30인을 뽑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승과(조선시대에는 승과를 일반적으로 禪科라고도 하였음.)에 합격하면 선 · 교의 구별없이 대선의 법계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중덕(中德)을 거쳐 교종에서는 대덕 · 대사로, 선종에서는 선사 · 대선사로 각각 올라가게 되었다.
승과가 조선 초기에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 1년(1419) 12월 임오일조를 보면 이 때 이미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이 강화됨에 따라 성종 · 연산군 치하에서 승과는 일시 중단되었고 중종 때에는 폐지되었다. 그것은 당시 선 · 교양종을 주축으로 하던 불교 자체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일환이었다.
그 뒤 승과는 명종 대에 이르러 다시 논의되었다. 1550년(명종 5) 12월 명종은 선교양종의 본사(本寺)를 부흥시켜 선종은 광주(廣州 : 지금은 서울의 일부)의 봉은사(奉恩寺)를, 교종은 양주(楊州)의 봉선사(奉先寺)를 각각 본사로 삼고 아울러 3년에 한번씩 승과를 실시할 것을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에 조정 신하들은 물론, 성균관 및 그 밖의 유생들이 즉각적으로 들고일어나 복립양종선과사(復立兩宗禪科事)의 철회를 강력히 그리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불교를 독신하던 중종의 비요 명종의 생모인 윤대비(尹大妃)가 정무를 독단하던 때였고, 또 보우(普雨)가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듬해인 1551년(명종 6) 6월 선종과 교종의 양종 선과를 다시 두고 승려에게 도첩을 주었다. 그러나 1565년 윤대비의 사망을 계기로 보우는 유배, 장살(杖殺)되고 양종과 승과 및 도첩제(度牒制)가 모두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활약한 유명한 중 서산대사 휴정(休靜)이나 사명당 유정(惟政)은 다 위의 복구된 승과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 뒤 승과가 언제 다시 복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중에는 권시토적지술(權時討賊之術), 즉 토적을 위한 임시방편으로 참급자(斬級者)에게 급선과(給禪科), 즉 승과합격증을 주는 정책을 몇 차례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지침으로 선과사목(禪科事目)이라는 것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승과에 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조선 말기까지 변동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러나 실제 시행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승과 실시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 예컨대 모두 몇 회나 실시되었으며, 몇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는지 등의 문제에 관한 자료도 전하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