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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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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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그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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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족보 그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
내용

보학을 근대적 의미에서 하나의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설정한다면, 보학의 문제영역은 족보란 무엇이며 족보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 또 족보가 우리 나라에서 발달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것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어떠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작용하였는가, 더 나아가 족보는 앞으로 어떤 형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의미의 보학은 아직 성립되고 있지는 못한 형편이다. 다만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학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 주요 씨족들과 그들 각 씨족내 주요 계파들의 내력이라든지 또는 그들 각 씨족 내지 각 계파에서 배출된 주요 인물들의 가계적 배경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보학은 이미 전통시대에서부터 발전하였으므로 보학의 역사는 족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비록 여기에서 말하는 보학의 연구목적을 일차적으로 족보에 관한 지식추구에 두고 있으나, 족보란 결국 씨족제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인만큼 그 족보를 통하여 씨족제도의 발달과정, 그리고 씨족제도가 우리 전통사회에서 차지하는 구실 내지 영향 등의 문제를 규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학문적인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즉, 보학은 우리의 전통사회구조와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소외될 수 없는 분야라고 하겠다. 전통사회, 특히 족보가 크게 발전하였던 조선시대에는 가문배경에 관한 요건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것과도 대체나 상쇄될 수 없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고, 이것은 이른바 양반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교양을 갖춘 웬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족보에 관심이 깊었으며, 자기 집안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의 족보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족보를 통해서 해당 가문의 내력을 알고 어느 인물의 가계 배경을 안다는 것은 사대부의 기본 교양의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유학자는 동시에 보학자이기도 했다.

당시 보학이라는 학문이 정식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아주 널리 쓰여졌다. 자기 집안의 내력은 물론 남의 집안의 족보까지도 통달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보학에 밝다’고 하였다.

이렇듯이 조선시대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당시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다 각 씨족보의 내용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이른바 보학이 크게 발달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또 만성보(萬姓譜)니, 대동보(大同譜)니, 또는 잠영보(簪纓譜)니 동국세보(東國世譜)니 하는 이름의 각종 종합보가 일찍부터 발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밖에도 팔세보(八世譜)니, 십세보(十世譜)니, 또는 팔고조도(八高祖圖)니 하는 일종의 종합보에 해당하는 가계보가 일찍부터 크게 발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상과 같은 종합보나 특수형태의 가계보는 일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며 중국에서도 전혀 발달하지 않은,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이다. 보학의 발달과 함께 보학의 대가도 많이 출현하였다.

≪문화유씨가정보 文化柳氏嘉靖譜≫를 만든 유희준(柳希濬, 1500∼1562)도 바로 그 보학의 대가이며, 모든 집안의 족보에 통달하여 어느 누가 와서 파계(派系)에 관한 것을 물어보아도 막히는 데가 없이 즉석에서 설명하였다고 하는 정곤수(鄭崑壽, 1538∼1602)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특히 ≪서천씨족보 西川氏族譜≫라는 종합보를 편찬하기도 한 그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육보(肉譜)’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밖에도 심희세(沈熙世, 1601∼1645)·조종운(趙從耘, 1607∼1683)·정시술(丁時述, 17세기 중엽에 활약)·임경창(任慶昌, 17세기 후반 활약)·이세주(李世胄, 17세기 후반∼18세기 초) 등이 널리 알려진 보학의 대가였다. 또한 황윤석(黃胤錫)이나 정약용(丁若鏞)도 학자로서의 진가는 다른 영역에 있지만 보학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였다.

최근의 인물로는 구희서(具羲書, 1861∼1930)가 보학으로 유명하다. 보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종합보를 만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많이 전하고 있는 잠영보니 세가보(世家譜)니 성휘(姓彙)니 또는 팔세보니 하는 것들은 바로 개인적으로 편찬한 여러 가지 형태의 종합보에 해당한다.

종합보 중에서는 조종운의 ≪씨족원류 氏族源流≫(7권), 정시술의 ≪제성보 諸姓譜≫(18권), 임경창의 ≪성원총록 姓苑叢錄≫(28권)이 특히 유명하였으며, 이것들은 ≪문화유씨가정보≫와 함께 각 씨족 족보편찬자들의 필수적인 참고자료로 이용되었다.

20세기 초 구희서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백씨통보 百氏通譜≫(46권)는 그 내용에 있어서나 분량에 있어 한국의 종합보의 최고봉을 이루는 역작이며, 1931년에 간행된 ≪만성대동보 萬姓大同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판 종합보이다.

참고문헌

『조선사회사연구』(송준호, 일조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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