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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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의격문/재격백관문/을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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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하려고 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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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격문은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하려고 쓴 문서이다. 격 또는 격서라고도 한다. 적군을 힐책하는 글과 급히 각 곳의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보내는 글도 포함된다. 격문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통문과 함께 중요한 의사 전달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격문의 일종인 사발통문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연명자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돌려서 썼다.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전통사회에서는 격문이 심리전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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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하려고 쓴 문서.
내용

격(檄) 또는 격서(檄書)라고도 한다. 적군을 설복하거나 힐책하는 글과 급히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 곳에 보내는 글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격문은 전쟁 또는 내란 때 군병을 모집하거나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거나 항복을 권유할 때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또한 혁명의 주모자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는 선전매체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대학입학 시험장 등에 내거는 현수막에 쓰여진 간단한 격려문구라든가, 전단에 자신들의 주장이나 선동 · 선전 등을 위한 글귀들을 인쇄하여 돌리는 것도 일종의 격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문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활용되어, 주로 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선전 · 선동의 설득수단으로 이용되었다. 612년(고구려 영양왕 23)에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냈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도 격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있을 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황소를 성토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도 유명한 격문으로서,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있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으로부터 그 평정책임을 맡게 된 평서원수 김부식(金富軾)이 3군을 거느리고 성천(成川)에 이르러 토적(討賊)을 위한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고 다시 북진하자, 묘청에게 가담했던 성들이 중앙정부군에 호응하게 되어 결국 난을 쉽게 평정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반란을 제압하는 데 있어서 심리전의 한 수단으로 격문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반대파를 성토, 회유, 설복시키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내우외환을 당할 때마다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환란을 극복하여 적군을 성토,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를 진작시키기 위한 내용의 격문이 많이 나왔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각 지방의 의병장들이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성심을 발휘, 왜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보전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보냄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기도 하였다.

격문은 주로 일반백성들을 그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특정 개인에게 보내는 사례도 적지 않았던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그때 경상도감사였던 김수(金睟)가 격문을 주고받으면서 대항한 바도 있다. 또한, 휴정(休靜)도 임진왜란 때에 격문을 발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승려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는데, 그때 호응한 승려의 총수는 5000여 인이나 되었다. 이익을 위한 여론형성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면서 통문(通文)과 함께 중요한 의사전달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통문 중에서 모병통문(募兵通文)은 특히 격문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또한, 사발통문이라는 일종의 격문도 있었는데, 이는 그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연명자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돌려서 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조선 말기 전봉준(全琫準)을 위시한 동학도들이 이러한 형식의 격문을 많이 돌렸으며, 또한 항일의병들도 동지규합과 국권회복을 위한 격문을 자주 돌려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격문이 심리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통문

참고문헌

『고려사』
『동국병감(東國兵鑑)』
『대동야승(大東野乘)』
『宋代新聞史』(朱傳譽, 臺灣 商務印書館,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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