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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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에게 어떤 사항을 알리기 위하여 길거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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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방문은 여러 사람에게 어떤 사항을 알리기 위하여 길거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게시물이다. 공고문·공지문, 또는 포고문의 옛 이름으로 줄여서 ‘방’이라고도 한다. 조정의 관리를 대상으로 한 방문은 ‘조방’이라고 불렀다. 민간인들이 정치를 비방하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한 방을 ‘민방’, ‘익명방’이라고 했다. 서울이나 주요 읍성은 성문과 종루 등에, 군현 이하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게시했다. 전시나 민란·혁명 등 사건이 발생한 유사시에 이용되었다. 근래에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에 따라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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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여러 사람에게 어떤 사항을 알리기 위하여 길거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게시물.
내용

공고문(公告文) · 공지문(公知文), 또는 포고문(布告文)의 옛 이름이다. 간단히 줄여서 ‘방(榜)’이라고도 하는데, 방에는 방문과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단인 방목(榜目)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잘 쓰이지 않는 용어가 되었으며, 대신 게시문 · 공고문 · 포고문 · 광고문 등으로 불리고 있다. 방문은 중국에서는 일찍이 백성들에게 정부의 정령(政令)과 포고사항을 알려주는 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 때에 와서는 그 대상이 확대되어 관료와 군민(軍民)들에 대한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조정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방문은 주로 조당(朝堂)에다 게시하였기 때문에 이를 ‘조방(朝榜)’이라고 불렀다. 한편, 민간인들도 방문의 형식을 이용하여 정치를 비방하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민간인들이 붙인 방이라 하여 ‘민방(民榜)’ 또는 ‘익명방(匿名榜)’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방문이 하나의 전달수단으로 사용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888년(진성여왕 2)에 임금의 총애를 받은 자가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고 상벌을 공평하게 행하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자, 익명으로 시정을 비방하는 내용을 대로상에 게시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방문이 존재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일반 백성들이 비방을 목적으로 붙인 익명의 민방을 우리나라에서는 ‘괘서(掛書)’라고 불렀다. 조정에서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중요한 사항을 방문을 통하여 통고하였다는 확실한 사실(史實)들이 조선시대에 와서 많이 보이고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1429년(세종 11) 2월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소 인원들이 그해 그해의 수교(受敎)한 것을 알지 못하여 범법한 자가 자못 많으니 금령조목(禁令條目)을 적당히 줄여 줄친 게시판을 만들어 광화문 밖과 도성의 각 군과 종루 등의 장소에 걸어 알려 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세종 때에는 방문이 법령포고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도 조정이나 관청에서 방문을 게시하여 어떤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기록이 문헌에 종종 나타나고 있는데, 방문을 통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는 사항들은 주로 국왕의 지시와 명령 · 법령 · 징모(徵募) · 농사 · 의술 등에 관한 소식들이었다.

한편, 국왕이 관리와 백성들을 훈계 또는 설득하기 위한 각종 윤음(綸音)이 방문의 형식으로 게시되기도 하였다. 본래 윤음은 인쇄되어 책자로 발간되었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윤음각(綸音閣)이라고 하는 것을 지어 그 속에 긴 판자를 가로 걸고 그 위에 윤음을 게시, 백성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교문(敎文)이나 나라에 경사가 있어 죄인들을 풀어 줄 때 임금이 내리는 사문(赦文)도 각 군현(郡縣)의 수령들이 한글로 번역, 방문형태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알렸다.

방문의 게시장소는, 서울이나 주요 읍성의 경우 성문과 종루 등이었고, 군현 이하의 행정지역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방문은 대체로 전시(戰時)나 민란 · 혁명 등과 같은 사건이 발생한 유사시에 많이 이용되었다.

예컨대,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당 일파는 새로 내각을 조직하고 신정령(新政令)을 반포하면서, 그것을 한성부 내의 수개 소에 방문으로 붙여서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다.

동학교도들도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1893년 3월 수천 명이 서울에 올라와 임금에게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리는 동시에, 서울시내의 외국인 주택과 교회 · 영사관 등에 “모든 외국인은 물러가라”는 내용의 방을 붙인 바 있다.

그 이전에도 동학교도들은 방문을 활용하여 주의 · 주장을 폈으며, 전봉준(全琫準)도 정령을 전주성문에 방으로 게시하여 민중에게 널리 알렸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방문이 신속한 전달매체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근래에 와서는 벽보로 통칭되고 있으나, 각종 대중전달 수단인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에 따라 이전처럼 많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주로 공공기관과 관공서의 각종 공지사항, 일반광고 등이 거리의 벽보판에 게시되고 있으며, 건물 내에서는 학교 · 회사 · 공장 등 각종 기관에서 학생이나 사원들에게 전달할 사항들을 벽보를 이용하여 알리고 있다.

특히, 대학가에서 학생 자신들의 의견이나 주장을 펴는 대자보(大字報)의 연원도 이 방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중국전근대신문사』(차배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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