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

불교
인물
일제강점기 봉은사 조실, 조계종 초대 종정 등을 역임한 승려.
이칭
한암(漢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6년(고종 13)
사망 연도
1951년
본관
온양(溫陽)
출생지
강원도 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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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봉은사 조실, 조계종 초대 종정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본관은 온양(溫陽). 성은 방씨(方氏). 법호는 한암(漢巖). 법명은 중원(重遠). 강원도 화천 출신. 아버지는 기순(箕淳)이며, 어머니는 선산(善山) 길씨(吉氏)이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으며, 1·4후퇴 때 국군이 퇴각하며 상원사를 불태우려 하자 죽음을 불사하고 지켜냈다.

생애와 활동사항

9세에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읽다가 반고씨(盤古氏) 이전에 누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1897년 금강산의 모습이 부처와 보살상을 닮은 것에 감격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의 행름선사(行凜禪師)를 모시고 수행하였으며, 이어서 금강산신계사(新溪寺)의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수업하다가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1899년 김천 청암사(靑巖寺)수도암(修道庵)에서 경허(鏡虛)가 일러준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듣고 오도(悟道)하였고, 9세 때부터 가졌던 ‘반고씨 이전의 인물’에 대한 회의가 풀렸다. 1905년양산 통도사의 내원선원(內院禪院)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牛頭庵)으로 들어가 깨달음 뒤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겨울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대오(大悟)하였다.

1925년 서울봉은사(奉恩寺)의 조실로 있다가, 강원도오대산으로 들어가서 27년 동안 동구 밖을 나오지 않았다. 1941년조계종(曹溪宗)이 출범되었을 때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어 4년 동안 조계종을 이끌었다.

1951년 1·4후퇴 직전, 그가 주석하고 있던 상원사로 퇴각 중인 국군 장교가 와서 절을 불태울 것을 알리자, 법당으로 들어가 좌정하고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장교는 그의 인격에 압도되어, 법당의 문짝만을 떼어 불살랐다.

제자로는 보문(普門)·난암(煖庵)·탄허(呑虛) 등이 있다. 저서로는 『일발록(一鉢錄)』이 있었으나 1947년 상원사의 화재 때 소실되었다.

상훈과 추모

1959년 3월에 문도들이 상원사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그리운 스승 한암스님』(김광식, 민족사, 2006)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가누나』(윤청광, 우리출판사, 2002)
『고려·조선(高麗·朝鮮)의 고승(高僧) 11인』(신구문고 40,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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