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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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국가 지원의 사찰 경제 축소책에 반대하여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를 울린 승려.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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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성민(省敏)은 조선 전기 국가 지원의 사찰 경제 축소책에 반대하여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를 울린 승려이다. 조선 건국 후 국가의 사찰 경제 축소책에 항의하며 복구시켜 줄 것을 요구하면서 신문고를 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개경사 주지로 있으면서 경주 백률사의 전단관음상을 옮겨와 개경사에 봉안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 전기, 국가 지원의 사찰 경제 축소책에 반대하여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를 울린 승려.
내용

성민(省敏)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로, 대지국사 찬영(粲英)주1이다.

성민은 조선이 건국된 후 국가에서 재정을 지원하는 사찰 수를 줄이고 또 토지와 노비를 삭감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1406년(태종 6) 2월 26일에 수백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신문고를 쳐서 복구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12년(태종 12), 성민은 개경사(開慶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경주 백률사(栢栗寺)에 있던 전단관음상(栴檀觀音像)을 옮겨와 봉안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고, 그해 10월 18일에 허락을 받아 안치하였다.

성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생몰년이나 출가 사찰 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이숭인(1347~1392)은 「천봉의 시고 뒤에 제하다[題千峯詩藁後]」라는 시에서 “승려들 중에 가끔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편지를 보내 나의 안부를 묻는 사람도 있었으니, … 장흥에서 학남(學南)과 성민을 얻었다.”라고 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장흥 출신의 승려일 것으로 여겨진다.

양촌 권근(1352~1409)은 「운암사의 늙은 선사 성민의 시에서 운을 차한다[次雲岩禪老詩韵(省敏)]」와 「내원당의 성민이 부채에 적어 보낸 시의 운을 차한다[次內願堂惠扇詩韵(省敏)]」라는 시를 통해, 그가 내원당에 소속된 적이 있으며 노년에 개경 운암사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성민은 신문고를 울리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개경사 주지를 하면서 경주 백률사의 전단관음상을 모셔 와 봉안한 일 등으로 볼 때, 조선 초 국가의 불교정책이 사찰의 경제권을 축소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이지, 불교 신앙 자체를 억압하려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타카하시 토오루, 『이조불교(李朝佛敎)』 (보문관, 1929)
『도은집(陶隱集)』
『양촌집(陽村集)』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논문

손성필, 「사찰의 혁거, 철훼, 망폐-조선 태종·세종대 승정체제 개혁에 대한 오해」 (『진단학보』 132, 2019)
주석
주1

문하에서 배우는 제자. 우리말샘

집필자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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