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산 백양사 ( )

불교
유적
남북국시대에 창건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사찰.
이칭
이칭
백암사(白巖寺), 정토사(淨土寺), 정토선원(淨土禪院)
유적/건물
소재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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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백양사는 남북국시대에 창건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시대 이래 백암사 또는 정토사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각엄존자와 그 문도들이 중창한 바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소요 태능의 문도들이 정착하였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환성 지안의 문도들이 사찰을 이끌었다. 근대에는 1947년 2월 만암 스님이 고불총림을 건설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에 창건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사찰.
창건과 사찰명

백양사는 백암사정토사라는 명칭으로 문헌에 나온다. 창건에 대해서는 1377년(우왕 3)에 정도전(1342~1398)이 지은 「백암산정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서 ‘신라 때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기록에서는 633년에 여환이 창건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역사적 신빙성이 거의 없다.

정도전은 「백암산정토사교류기」에서 송나라 주1 연간에 정토선원(淨土禪院)으로 사찰명을 바꾸었다고 하였지만, 송나라 경평 연간은 423424년이므로 이 기록은 오류이다. 아마도 경덕(景德: 1007)주2, 경우(景祐: 10341037), 치평(治平: 1067)주3 연간일 가능성이 높다.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주석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흰 양들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자신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백암사와 정토사라는 사찰명이 계속 사용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이후부터 백양사라는 통일된 사찰의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변천

12세기에 중연(中延)이 주4 · 문무(門廡) · 주5 · 요빈(賓寮) 등 80여 칸을 중수하였다. 또 1188년(명종 18)에 명종을 위해 관음상을 조성하고 축성법석(祝聖法席)을 베풀기도 했다. 그 후 백암사를 중창한 인물은 수선사 제13대 국사에 오른 각엄존자(覺儼尊者) 복구(12701355)이다. 그는 8세 때 백암사에서 일린(一麟)을 따랐으며, 10세 때인 1279년(충렬왕 5)에 원오국사 천영(12151286)에게 삭발하였다.

복구는 1290년(충렬왕 16)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으나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고, 백암사 · 월남사 · 송광사에서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1330년(충숙왕 17)에는 송광사의 수선사 제13세 주6가 되었다. 이 무렵 백암사의 중창 불사를 지원하여 불전(佛殿) · 불상(弗像) · 종고(鐘鼓) · 승방(僧房) · 삼문(三門) · 주고(廚庫) 등을 갖추었으며, 제자 심백(心白)과 지부(智孚) 등에게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구해오도록 하여 1341년 4월에 전장법회(轉藏法會)를 개최하였다. 전장법회는 1348년, 1353년, 1409년에도 개최되었다.

복구는 1350년 수선사의 법주를 사퇴하고 백암사로 옮겼는데, 그해 10월에 임금이 왕사로 책봉하고 불갑사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1355년(공민왕 4)에는 불갑사에서 다시 백암사로 옮기고, 1355년 7월 임금에게 하직하는 편지를 남기고 제자들을 모아 법을 설한 후 입적하였다.

복구의 뒤를 이어 백암사를 이끈 이는 친 조카이기도 한 청수(淸叟)였다. 1370년에 큰 비가 내려 교루(橋樓)가 무너지자 이를 중수하고 정도전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조선 초기 1393년(태조 2)에 작성된 『백암사전장수(白嵓寺傳帳受)』에 보이는 백암사의 가람 규모는 다음과 같다. 주7 3칸, 대장전(大藏殿) 3칸, 승당(僧堂) 5칸, 식당(食堂) 3칸, 주8 6칸, 시자료(侍者寮) 3칸, 중행랑(中行廊) 3칸, 감원방(監院房), 요련(寮連) 12칸, 객료(客寮) 3칸, 종루전(鍾樓殿) 3칸, 삼보수(三寶稤) 2칸, 대수(大稤) 3칸, 주사(廚舍) 3칸, 남행랑(南行廊) 10칸, 세각(洗閣) 3칸, 주9 2칸, 주10 3칸, 침가(砧家) 2칸, 사문(沙門) 1칸, 루교(樓橋) 3칸.

1447년(세종 29) 7월 9일에 여주 신륵사에서 문도공(文度公)의 영정(影幀)을 모셨는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세종이 장성 백암사 승려 학몽(學蒙)에게 들어가 살게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백암사 승려에 대한 왕실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양사에서 출가한 소요 태능(15621649)의 문도들이 이끌었으나 1786년(정조 10) 편양문파의 환성 지안(16641729)이 중건한 이후 지안의 문도들이 백양사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지안의 법맥을 계승한 연담 유일(17201799)의 제자 양악 계선(17571837)이 백양사의 강원(講院)을 크게 발전시켰다. 19세기 호남의 강백들은 대부분 백양사 강원에서 공부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전국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백양사도 지역(紙役), 잡역(雜役), 의승(義僧) 등 승역(僧役)이 과중하여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1917년 만암 종헌(1876~1956)이 중창하였다. 만암은 45세 때부터 백양사 주지직을 맡아 30년 가까이 주석하면서 불사(佛事)에 진력하는 한편, 강원(講院)을 개설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극락보전(極樂寶殿) · 명부전(冥府殿) · 칠성각(七星閣) · 주11 · 천왕문(天王門) · 주12 · 주13 · 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백양사의 산내 주14로는 청류암(淸流庵), 운문암(雲門庵), 약사암(藥師庵), 영천굴(靈泉窟), 물외암(物外庵), 천진암(天眞庵) 등이 있다. 청류암은 1350년(충정왕 2)에 각엄국존이 세웠다고 전하며, 운문암은 선원으로 유명하였다.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백양사 고불총림

1945년 해방이 되자 전국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염원이 분출되었다. 이때 불교계에서도 교단의 재정비와 수행 풍토의 조성을 위한 여러 방안이 강구되고 있었는데, 1947년 백양사의 고불 총림과 해인사의 가야 총림 건설이 대표적이다.

백양사에서는 만암 종헌이 일제의 불교를 걷어내고 한국 전통의 불교를 회복하기 위해 1947년 2월 고불 총림(古佛叢林)을 표방하였다. ‘고불(古佛)’이라고 한 바와 같이 부처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 수행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만암의 총림 건설은 전국 사찰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많은 수행자를 배출하였다.

백양사 이야기

백양사 오른쪽 계곡 상부에 있는 국제기(國祭基)는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호남 일대에 재난이 있을 때에는 나라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주15를 올렸다. 조선시대 영조 때 호남지방에 대유행병(大流行病)이 나돌아 호남 감사가 영조에게 상소를 올리자 영지를 택하여 크게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으므로, 이곳 바위에다 ‘國祭基’를 음각(陰刻)하여 새기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 그 유래이다.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굴 속의 바위 틈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 장마 때나 가뭄 때나 항상 일정한 물이 흐르는 이 샘에는 옛날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어떤 손님이 와서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백양십이경의 하나인 일광정(日光亭)에서는 해마다 주16에 불가(佛家)의 시련법식(侍輦法食)이 거행되며, 백양사 뒤의 학바위는 고려 때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천제를 지낸 곳이라 한다.

중요문화재

백양사에는 보물 3점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4점이 지정되었고, <청류암 관음전>이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바라보는 백학봉 암벽과 숲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백양사 백학봉>이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1947년 백양사 고불 총림을 결성할 때 고불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매화 <백양사 고불매(古佛梅)>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사찰 일대의 비자나무 숲은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약 3만 그루가 밀집하고 있어 춘백양(春白羊) 추내장(秋內藏)이란 칭호를 얻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은 <소요대사탑>,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극락보전>, <대웅전>, <사천왕문>, <각진국사 복구 진영>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단행본

이고운, 박설산, 『명산고찰 따라』 (우진관광문화사, 1982)
『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1976)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전통사찰총서 7-광주 · 전남의 전통사찰Ⅱ-』 (사찰문화연구원, 1996)

논문

김광식, 「만암의 불교정화관」 (『선문화연구』 14, 2013)
김문경, 「조선후기 백양사의 승역에 대한 고찰」 (『선문화연구』 2, 2007)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의 강학 전통과 백양사 강원의 역사」 (『불교학연구』 25, 2010)
이병희, 「고려말 조선초 백양사의 중창과 경제문제」 (『한국사연구』 99, 1997)
주석
주1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 소제 때의 연호(423~424). 우리말샘

주2

중국 북송 진종 때의 연호(1004~1007). 우리말샘

주3

중국 북송 영종 때의 연호(1064~1067). 우리말샘

주4

높고 크게 지은 화려한 집. 우리말샘

주5

주지의 거실을 이르는 말. 사방 열 자의 방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샘

주6

한 종파의 우두머리. 우리말샘

주7

조선 시대 삼단 신앙에 따라 구성된 사찰의 공간 구성 형식에서 상단 신앙이 이루어지는 곳에 있는 주요 전각 가운데 하나. 우리말샘

주8

한 집에서 주인이 거처하는 방. 우리말샘

주9

절의 뒷간. 승방의 동쪽에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10

말을 가두어 기르는 곳. 우리말샘

주11

고승이나 선지식의 영정을 모신 전각. 우리말샘

주12

참선하는 방. 우리말샘

주13

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우리말샘

주14

큰 절에 딸린 작은 절. 우리말샘

주15

하느님에게 지내는 제사. 우리말샘

주16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음력 4월 8일로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다. 이날에는 파일등을 단다. 8일 및 9일의 이틀 밤에는 집집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등에 불을 켜 달고 그 아래서 물장구를 치거나 풍악을 하고, 딱총과 불놀이를 하며 느티나무의 잎을 넣어 만든 시루떡과 검정콩을 쪄서 먹는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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