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수선사(修禪社)의 제13세 국사. 성은 이씨, 호는 무능수(無能叟) 또는 무언수(無言叟). 고성(固城) 사람이다. 부친은 충렬왕 때의 문관인 존비(尊庇)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맑아 불법(佛法)을 존경하였고 놀 때도 불가(佛家)의 규칙을 본떴다고 한다. 10세 때 조계산(曹溪山)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 밑에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고, 천영이 입적함에 따라 대선사(大禪師) 도영(道英)을 좇아 공부하였다.
약 10년을 수학하여 총림의 여러 승려들의 추천을 받아 승과에 나아갔고 21세에 선선상상과(禪選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직후에 산림 속에 머물러 명리에 초연하였으며 자각국사(慈覺國師)가 그를 지극한 예로써 대우하여 학도들을 맡기려 하였다. 그는 “얻은 바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진실로 감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 백암사(白巖寺)로 옮겨가 10여 년 동안 참선하며 진리를 연구하였다.
그 뒤 월남사(月南寺) · 수선사 등에 40여 년을 머물면서 주1와 주2을 위하여 노력하여 국왕의 주3을 받았다. 공민왕 이전 어느 시기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고 각엄존자(覺儼尊者)라는 주4를 받았으며, 공민왕이 즉위하고 1352년(공민왕 1)에 삼보를 공경하라는 태조의 유훈에 따라 전왕의 공경을 받던 왕사 복구를 또 한 차례 왕사로 책봉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참고로 그는 충혜왕대 이미 왕사를 지내고 있던 사실이 확인된다.
공민왕 대 책봉 당시에 복구는 왕명을 받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佛岬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왕은 복구의 나이와 건강을 염려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예를 거행하였고 시중인 이제현에게 찬(讚)을 짓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책봉을 위해 그가 거처하는 곳으로 예물과 국서를 전달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과 존경을 표하였다. 그는 1355년에 불갑사에서 백암사로 옮겨 거처하였고 병세를 보여 그 해 7월 27일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문인주5으로는 선원(禪源) · 백화(白華) · 가지(迦智) · 마곡(麻谷) 등 이하 천여 명이 있었다. 국사로 주6 시호는 각진(覺眞), 탑호는 자운(慈雲)이다. 이후 1359년에 제자 원규 등이 비를 건립해 주기를 왕에게 주7 이에 주8을 받은 이달충(李達衷)이 주9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이 글씨를 써서 불갑사에 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