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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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물
고려 초 중국 보자원(報慈院), 용화사(龍華寺) 등을 주석한 승려.
이칭
제운(齊雲), 진각(眞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870년(경문왕 10)
사망 연도
947년(정종 2)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영조는 고려 초 중국 보자원, 용화사 등을 주석한 승려이다. 호는 제운 또는 진각이다. 당나라 말에 저장성 항주 일대로 가서 선법을 구하다가 설봉을 찾아 선법의 대의를 묻고 수도하였으며, 설봉의 밑에서 오도하여 법을 전해 받았고, 청원행사의 7세손이 되었다. 누더기 한 벌을 걸치고 대중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포납이라 불렸다고 한다. 오월의 왕은 그를 내도량으로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청하였다. 영조의 법문이 『경덕전등록』에 전한다.

목차
정의
고려 초 중국 보자원(報慈院), 용화사(龍華寺) 등을 주석한 승려.
내용

영조(靈照)는 고려 초 활동한 승려이며 호는 제운(齊雲) 또는 진각(眞覺)이다. 870년(경문왕 10)에 출생하여 947년(정종 2)에 입적하였다. 주1 말에 저장성 항저우(杭州) 일대로 가서 주2을 구하다가 설봉(雪峰)을 찾아 선법의 대의를 묻고 수도하였으며, 설봉의 밑에서 주4 법을 전해 받았다. 설봉(822~908)은 복주에서 따르는 학자가 천오백인이 넘고, 문하에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 현사종일(玄沙從一, 831908), 보복종전(保福從展, ?928),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경청도부(鏡淸道怤, 868936) 등의 주8이 배출된 대덕이다.

또한, 영조는 청원행사(淸原行思)의 7세손이 되었다. 청원행사는 육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종 계열 중 하나인 주5의 인물이다. 영조는 누더기 한 벌을 걸치고 대중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 누더기스님)이라고 불렀다.

설봉의 법맥을 이은 뒤 경청원(鏡淸院)에 머물다가 후주태수(湖州太守) 전공(錢公)이 보자원(報慈院)을 창건하여 그를 모셨으며, 다시 전공이 용화사(龍華寺)를 창건하여 주지직을 맡겼다. 그는 이 절에서 선법을 전하다가 주6 한다. 그리고 중국 주7 시대 10국 중 하나인 오월국(吴越国, 907~978)의 왕은 그를 내도량(內道場)으로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청하였다.

78세에 입적하였으며 탑은 항저우 대자산(大慈山)에 세워졌다.

영조의 법문 중 일부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조당집(祖堂集)』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단행본

조영록, 『동아시아 불교교류사 연구 (남종선의 도입과 관음설화의 전개)』(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주석
주1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2

참선하는 법. 우리말샘

주3

도를 닦다. 우리말샘

주4

중생이 선악의 업보에 따라 가는 다섯 세계. 곧 천도, 인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이다. 우리말샘

주5

중국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조계(曹溪)에서 법을 전하여 일어난 종파. 제2조 조산(曹山)과 제1조 동산(洞山)의 이름에서 종명을 삼았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6

승려가 죽다. 우리말샘

주7

중국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뒤부터 송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흥망한 왕조. 또는 그 시대.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의 다섯 왕조와 중원 이외 지방의 전촉(前蜀), 오(吳), 남한(南漢), 형남(荊南), 오월(吳越), 초(楚), 민(閩), 남당(南唐), 후촉(後蜀), 북한(北漢)의 열 나라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8

덕과 학식이 높은 승려를 용이나 코끼리의 위력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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