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주12이다. 신라시대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는 설, 1183년(명종 13)에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이 창건하였다는 설 등이 있으나, 주변 유물로 보아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창건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그 뒤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慧諶, 11781234)과 혜근(惠勤, 13201376)도 이곳에서 주1 한다. 지눌이 당나라 종밀(宗密, 주3의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린 ‘절요(節要)’와 자신의 견해인 ‘사기(私記)’를 삽입하여 펴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潗別行錄節要幷入私記)』를 1486년(성종 17) 규봉암에서 간행한 것으로 이 절의 당시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규봉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금폐(今廢)'라고 기록하고 있어 17~18세기에는 주4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연경(演瓊)이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세운 것은 1729년(영조 15)으로 1914년에 진응혜찬(震應慧燦)에 의해 『규봉사 사적기(圭峰寺事蹟記)』가 쓰여졌다. 한국전쟁으로 폐사가 된 것을 1957년 주지 이한규가 대웅전과 주5를 신축하였으며, 최근에는 정인(正因)이 1995년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96년 관음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 아래에 자리 잡고 있고, 뒤편에 주6을 안치한 석굴이 있으며, 그 앞에 요사채가 있다. 높이 1.3m의 마애여래 좌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천연의 주7에 동굴을 뚫고 불상을 조각하여 안치한 것으로 우리나라 석굴 사원 양식 변천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절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바위들이 수없이 솟아 주9을 이루고 있다. 은신대(隱身臺) · 삼존석(三尊石) · 십이대(十二臺) · 광석대(廣石臺) · 풍혈대(風穴臺) · 설법대(說法臺) 등의 명소들은 신라와 고려 때의 고승들이 수도하였던 자리라고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삼존석과 십이대에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므로 기이하게 여겨 의상이 주8를 지었다는 설화와 함께 지눌과 혜심이 수도하여 득도하였다는 설이 전래되고 있다. 은신대는 지눌이 이 바위에 앉아 조계산의 산세를 바라보면서 송광사의 절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