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松廣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1622년(광해군 14) 청량산 원암사(圓巖寺)가 화재로 소실되자, 응호(應浩) · 승명(勝明) · 운정(雲淨) · 덕림(德林) · 득순(得淳) · 홍신(弘信) 등 원암사 승려들은 지금의 송광사 자리가 고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길지로 지정하였던 곳이라 하고 여러 전각과 주1를 새로 건립하였다.
1631년(인조 9) 대웅전 주2을 거행하고, 1638년(인조 16) 후불탱을 조성하였다. 1640년(인조 18) 시왕전이 완성되었으며, 1641년(인조 19)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이 무렵 병자호란 의승장 벽암 각성(15751660)이 1640년에 조정으로부터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임무를 명령받자 송광사 승려들은 전라도 감영(監營)을 찾아가 각성이 송광사에 머물 수 있도록 요청하여 성사시키고, 1641년 법당의 본존 삼존불을 봉안한 후 낙성식을 거행하고 사찰명을 ‘송광사’라고 하였다. 송광사 승려들과 각성은 창건을 기념하며 50일 동안 화엄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전국에서 천 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송광사개창비」를 세웠다. 비문은 동양위 신익성(15881654)이 짓고, 의창군 이광(1589~1645)이 글씨를 썼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불교계는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하는 주3의 주4을 중시하면서 청허계와 부휴계가 성립되었다. 청허계는 임진왜란 팔도도총섭이었던 청허 휴정(15201604)의 문도들이고, 부휴계는 병자호란 때 의승병을 이끌었던 벽암 각성의 스승인 부휴 선수(15431615)의 문도였다.
송광사의 개창 과정에서 각성이 주석한 이래 그의 문도들이 송광사의 경영을 주도하면서 송광사는 부휴계의 사찰이 되었다. 그런데 송광사에서 출가한 무경 자수(16641737)가 젊은 시절에 경상북도 김천 불영산에 주석하고 있던 부휴계의 모운 진언(16221703)에게 『화엄경』과 『대승기신론』 등을 배웠지만, 30세가 되던 해에 송광사 근처 추줄산 운문사에 주석하고 있던 청허계의 추계 유문(1614~1689)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의 법맥을 이었다. 자수는 유문이 입적하자 송광사에 그의 승탑을 세우는 등 청허계 법맥을 현창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이로써 송광사는 청허계와 부휴계가 공존하는 사찰로 이어졌다.
한편, 1764년(영조 40)에 송광사에서 사암 채영(獅巖采永)이 여러 산문의 승려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듣고 계파의 법맥을 정리하여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여기에는 청허계가 2,522인, 부휴계가 614인으로 전체 3,136인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부휴계의 벽담 행인(碧潭幸仁)이 청허계가 중심이 되고 부휴계가 소홀하게 다루어졌다고 비판하며 완주 송광사로 찾아와 판목을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판목 전체를 불태우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 일부 판목이 남아 있다.
1725년(영조 1)에 작성된 「법당화주록(法堂化主錄)」에 따르면, 당시 송광사에는 법당(대웅전), 팔상전, 시왕전(十王殿), 서전(西殿), 패전(牌殿), 종각, 정문, 천왕문, 금강문, 향로전(香爐殿), 승당, 선당(禪堂), 매화당(梅花堂), 제월당(霽月堂), 백운당(白雲堂), 청풍료(淸風寮), 낙월료(落月寮), 연화당(蓮花堂)의 18동이며,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水道庵), 동암(東庵), 쌍계암(雙溪庵), 북암(北庵), 수도암(修道庵), 태조암(太祖庵) 등 8곳이 있었다.
1631년(인조 9)에 상량을 한 대웅전은 정면 7칸에 중층 구조의 대규모 주5이었는데, 1681년(숙종 7) 무렵 도규(道䂓), 1707년(숙종 33) 신열(信悅), 1814년(순조 14) 정준(定俊)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런데 지속적인 중건에도 건물이 계속 기울어지자 1857년(철종 8)에 묘원(妙圓)이 화주하여 중창할 때 지금과 같이 정면 5칸의 단층 구조로 개조하였다.
1649년(인조 27)에 천왕문과 소조사천왕상, 1656년(효종 7)에 목조 석가여래삼존좌상, 나한전과 오백나한상, 금강문 등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1717년(숙종 43)에 연화당(蓮花堂)이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725년(영조 1)에 재건하였고, 1813년(순조 13) 관음전을 중수하였으며, 1814년(순조 14)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원암사 간행 불서로 15~16세기 5종이 확인되고, 송광사 간행 불서는 18세기에 2종이 확인된다. 원암사에서 간행한 불서로는 1452년(문종 2) 『대부모은중경』과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1457년(세조 3) 『육경합부』, 1551년(명종 6) 『법보단경(언해)』, 1565년(명종 20) 『예념미타도량참법』이 있다. 송광사에서 간행한 불서로는 1764년(영조 40)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 1768년(영조 44)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이 있다. 그런데 청량산 원암사가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전주부에 보이고, 또 무경 자수의 문집에 「청량산 원암사 명부전기」라는 글이 보이므로, 17세기에 폐사되었다가 18세기 초에는 사찰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는 국가문화유산 보물 5점, 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 8점, 전라북도 문화유산자료 1점을 소장하고 있다. 보물에는 창건 당시에 세운 대웅전, 종루가 있고, 벽암 각성의 영향 하에 조성된 소조 석가여래삼불 좌상 및 복장유물, 소조 사천왕상, 목조 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나한전, 오백나한상 일괄, 금강문, 일주문, 송광사사적비, 목조삼전패가 있고, 1716년(숙종 42) 무등산 증심사에서 제작한 동종이 있다. 전라북도 문화유산자료로는 벽암당부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