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석가여래(중앙) 5.5m, 약사불(좌) 5.2m, 아미타불(우) 5.2m. 석가 · 약사 · 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三世佛)로서 전북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의 소조불[塑造佛: 진흙으로 만든 불상]이다. 그리고 이 불상의 복장에서 불경류, 후령통 등 다수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조성시주목록(造成施主目錄)」에 ‘숭정 14년’의 조상기가 있어 이들 불상이 1641년(인조 19)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상기에는 주상(主上)과 왕비 전하의 만수를 기원함과 동시에 “世子邱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增福壽亦爲還國(세자저하수천추 속환본국 봉림대군증복수역위환국)”이라 기록하고 있어, 당시 인조의 두 아들로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되어 중국 심양(瀋陽)에 끌려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기 위해 불상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제작은 당시 승장(僧將)이었던 각성(覺性)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삼세불 각각은 수인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형식의 좌상이다. 머리는 예리하고 촘촘한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지만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의 윤곽이 불분명하다. 중앙 계주(中央髻珠)에 비해 정상 계주(頂上髻珠)는 작은 편이다. 얼굴은 넓적한 직사각형으로 크게 뜬 눈과 사다리꼴 모양의 두툼한 코가 인상적이다. 꽉 다문 작고 얇은 입가에는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밋밋한 가슴 등 신체는 볼륨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걸쳐진 옷자락은 도식화되었지만 그 흐름이 복잡하면서도 유려하여 소조불 특유의 질감이 돋보인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으로 착용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착의법과는 달리 옷깃이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복부를 돌아 오른쪽 어깨 위로 덮인다. 마치 옷을 착용한 뒤 오른팔을 소맷자락에서 빼낸 듯한 특징적인 모습이다.
가슴 위로 노출된 군의(裙衣)는 상단이 평행이고 세 겹으로 접혀졌으며 이를 묶은 허리띠는 두 줄로 규격화되었다. 도식적인 골주름이 새겨진 오른쪽과는 달리 가부좌(跏趺坐)한 왼다리 위에는 왼쪽 손목을 감싸고 흘러내린 옷자락을 물결형으로 드리워 변화를 주었다.
중앙의 석가불은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땅으로 드리우는 손 모양을 맺었다.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장지와 약지를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약사불은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서 약호(藥壺)를 쥐었으며, 아미타불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