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1150년(의종 4)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다고 전하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거의 없다. 석암사(石菴寺)로 전해오다가 조선 후기에 봉곡사로 사찰명을 바꾸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주1 온양군조에 “석암사는 송악산(松岳山)에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고려시대부터 전래되어 오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1647년(인조 24)에 다시 세우고, 1794년(정조 18)에 경헌(敬軒)과 각준(覺俊)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사찰명을 봉곡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다산시문집』에는 봉곡사가 여러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령 「목재에게 올리는 글[上木齋書]」에서는 “석암사(石庵寺)에는 거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라 하였고, 「이계수에게 답함[答李季受]」에서는 “온양 서암사(西巖寺)”라고 하였으며, 「복암에게 답함[答茯菴]」에서는 “옛날에 석암사(石巖寺)에 있을 때”라고 하였다. 또 「봉곡사에서 지은 술회시의 서[鳳谷寺述志詩序]」라는 글을 남겼다. 즉 같은 사찰에 대해 석암사(石庵寺), 서암사(西巖寺), 석암사(石巖寺), 봉곡사(鳳谷寺)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찰명을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명칭을 혼동하여 사용하였던 것 같다. 정약용은 1795년에 봉곡사에서 여러 선비들과 함께 성호 이익(16811763)의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편집한 바 있다.
1825년(순조 25) 봄 요사를 중수하는 한편 2층 누각을 신축하였고, 1872년(고종 9) 서봉(瑞峰)이 주2의 주3 10여 칸을 증축하였으며, 1931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의 고승 송만공(1871~1946)은 1895년(고종 32) 봉곡사 새벽 예불에서 “마땅히 법계의 성품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으며 주4을 치다가 홀연히 깨달았다고 한다.
봉곡사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2점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2점이 소장되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석가여래좌상과 1867년(고종 4) 수화승 해명당 산수와 차화승 춘담봉은이 제작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는 대웅전 및 고방(庫房)과 관세음보살을 그린 가로 40㎝ × 세로 75㎝의 봉곡사불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