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 마곡사 ( )

불교
유적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자장이 충청남도 공주에 창건한 사찰.
유적/건물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마곡사는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자장이 충청남도 공주에 창건한 사찰이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성주산문의 개창자 무염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 후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했다고 전하며 보물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2018년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마곡사를 비롯한 7개의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의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자장이 충청남도 공주에 창건한 사찰.
건립경위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泰華山)에 있는 1000년 주1이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의 본사이다. 절의 창건주와 시기, 마곡사라는 사찰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640년(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고승 자장(慈藏)선덕여왕이 하사한 전(田) 주2로 절을 짓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 · 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이 전한다. 이때 주3을 할 때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백제 땅에 신라의 고승 자장이 와서 절을 건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무염(無染)이 당에서 돌아와 절을 지을 때 중국의 스승인 마곡 보철(麻谷普徹)의 이름을 따서 마곡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염은 공주 성주사(聖住寺)를 근거지로 하여 뒤에 주4이 되는 주5을 열어 활동하고 교화했다. 한편 절이 들어서기 전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변천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고려 전기에 200년 가까이 황폐화되어 도적 떼의 소굴로 이용되던 것을 12세기 후반에 보조 지눌(普照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주6 전한다. 보조 지눌이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적들에게 물러가라고 했지만 도적들이 오히려 해치려 하자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이한 술수로 많은 호랑이들을 만들어 도적들에게 달려들게 했더니 도적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에 지눌은 중창불사를 하여 주7을 이루었는데, 임진왜란 때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고 한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보전영산전 · 대적광전 등을 주8 기록이 전한다.

2층의 대웅 주9은 조선 중기의 사원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건물이다. 기둥을 안으며 한바퀴 돌면 6년을 더 산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영산전의 현판은 세조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 전해진 것이다.

구한말주10에는 동학 농민 주11과 의병 부대에 가담했던 김구(金九)가 마곡사에 머문 인연이 있다. 명성황후 주12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스치다 조스케(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 와서 머리를 깎고 주13을 원종(圓宗)이라 했다. 마곡사에 오래 있지는 않았고 1899년 봄에 금강산으로 떠났는데, 해방 후 1946년에 다시 들려 대광보전 기둥의 주련에 새겨진 “돌아와 세상을 보니 꿈속 일과 같구나.”라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남아있다. 마곡사는 일제강점기 31본산(本山)의 하나로서 충청남도 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였다.

형태와 특징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넘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영산전(靈山殿),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대광보전(大光寶殿),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興聖樓), 해탈문(解脫門), 천왕문(天王門), 16나한상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명부전(冥府殿)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주14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고,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 · 연화당(蓮華堂) · 매화당(梅花堂) 등 요사채가 즐비하다. 마곡사에는 오층석탑과 주15, 석가모니불 괘불탱 등 다양한 유형의 문화유산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형태상 주16 탑의 영향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탑이 무너져서 안에 든 보물이 도난당했으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절의 부속 암자로는 심정암(深淨庵) · 부용암(芙蓉庵) · 북가섭암(北迦葉庵) · 토굴암(土窟庵) · 백련암(白蓮庵) · 영은암(靈隱庵) · 대원암(大願庵) · 은적암(隱寂庵) 등이 있다.

한편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주17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한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주18를 드렸다. 그는 장애를 고치기 위해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다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했다. 100일 뒤 작업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 문을 걸어나갔다.

의의 및 평가

마곡사는 ‘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봄의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 2018년 6월에 마곡사를 비롯한 한국의 7개 주19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 주20에 등재되었다.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1과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권6이 1963년에 보물이 되었고, 1984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영산전, 대광보전, 오층석탑, 그리고 1997년에 보물이 된 석가모니불 괘불탱이 있다. 또 대웅보전 목조 삼세불상, 영산회상도와 영산전 목조 칠불좌상 및 복장 유물, 동제 은입사 향로와 동종, 포교당 범종, 명부전, 응진전, 천왕문, 해탈문, 국사당, 심검당 및 고방과 같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공주읍지(公州邑誌)』

단행본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동국대 출판부, 1979)
『문화유적총람-사찰편』 (충청남도, 1990)
『마곡사지(麻谷寺誌)』 (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12)
『마곡사』 (공주시청·마곡사, 2020)

논문

임창옥, 「태화산 마곡사의 사격과 불교유산의 보존」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95,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23)
정은우,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금동보탑 연구」 (『백제문화』 52-1,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2015)
주석
주1

역사가 오래된 옛 절. 우리말샘

주2

논밭 넓이의 단위. 세금을 계산할 때 썼다. 한 결은 한 동의 열 배로, 그 넓이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우리말샘

주3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 우리말샘

주4

통일 신라 이후 불교가 크게 흥할 때, 승려들이 중국에서 달마의 선법(禪法)을 받아 가지고 와 그 문풍(門風)을 지켜 온 아홉 산문. 실상산문, 가지산문, 사굴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수미산문이다. 우리말샘

주5

신라 때에, 선종 구산문(九山門)의 하나. 문성왕 7년에 무염 선사(禪師)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성주사를 중창하고 개산(開山)하였다. 우리말샘

주6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다. 우리말샘

주7

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 우리말샘

주8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9

부처를 모셔 두는 건물. 우리말샘

주10

조선 말기에서 대한 제국까지의 시기. 우리말샘

주11

조선 고종 31년(1894)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혁명.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가 발단이 되었으며, 봉건 체제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한 봉기로 이어졌다. 후에 항일 의병 투쟁과 3ㆍ1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우리말샘

주12

부모나 임금 등을 죽임. 우리말샘

주13

승려가 되는 사람에게 종문(宗門)에서 지어 주는 이름. 우리말샘

주14

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우리말샘

주15

고려 시대 1330년에, 감색의 종이에 은니로 쓴 법화경. 묘법연화경 권1~7을 모두 필사한 완질본으로, 당시 지금의 부여군인 홍산군의 호장(戶長)으로 있던 이신기(李臣起)가 아버지의 장수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사경(寫經)한 석(釋)이다. 우리나라 국보이다. 우리말샘

주16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7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우리말샘

주18

목적을 가지고 백 일 동안 기도를 드림. 또는 그렇게 드리는 기도. 우리말샘

주19

산속에 있는 절. 우리말샘

주20

국제 연합 전문 기관의 하나.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과 국제 교류 증진을 통한 국제간의 이해와 세계 평화를 추구한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용태(동국대학교 교수, 지역불교 및 불교사 연구(조선시대 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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