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또한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대흥성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므로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공주 성주사(聖住寺)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1293년(충렬왕 19)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그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논에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佛敎)와 선종 조사들의 도인 조도(祖道)를 구별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분은 그에 의해서 처음 도입되었다.
또한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하는 것이 조도라고 정의하였고, 청정이나 부정 등의 상대적인 구별을 넘어선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말을 빌려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불교는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쓴 부처의 방편이라고 보았다.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쓴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