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속성은 조씨(曺氏). 법호는 순명(順命), 당호는 제월당(霽月堂). 경헌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조예창(曺芮昌)이고,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0세에 어버이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좋아하였으며, 15세 때 출가하여 천관사(天冠寺)에서 옥주(玉珠)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유학자들에게서 시서(詩書) 등을 지도받았으나, 출세간(出世間)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원철(圓哲)의 인도를 받아 지리산의 현운(玄雲)을 찾아가서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의 교리를 통달하였고, 다시 희사(熙師)와 열사(悅師)의 지도를 받아 달통한 경지에 이르렀다.
1576년(선조 9) 묘향산으로 가서 청허 휴정(淸虛休靜)에게서 선종(禪宗)의 밀지(密旨: 비밀스런 가르침)를 얻어 오도(悟道)하였다. 1578년(선조 11) 봄부터 금강산 내원동에서 수행하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좌영장(左營將)의 직첩(職牒: 임명 사령서)을 내렸으나 사양하였으며, 의병에 참여하라는 휴정의 서신을 받고 진중에 나가 유나(維那: 승려의 수행을 이끄는 직책)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정연(淨筵: 기도를 하기 위한 천막)을 설치하고 관음기도(觀音祈禱)를 하는 등 법력을 비는 한편, 왜군을 격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조정에서는 다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직첩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 뒤 금강산 · 오대산 · 치악산 · 보개산(寶蓋山) 등 여러 명산을 두루 다녔으며, 그 가운데 금강산을 가장 좋아하여 30여 년간 머물렀다. 1618년 봄 은선동(隱仙洞)에 암자를 지어 7년간 머물렀고, 1623년 봄 오대산으로 옮겨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여 학덕과 선풍이 널리 알려졌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승려 교육과정의 사집과에 속하는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로써 지견(知見)을 열게 하였고, 『선요(禪要)』와 『서장(書狀)』으로 수행중에 나타나는 갖가지 병을 제거하게 하였으며, 언제나 삼학을 닦으면서 절도 있고 청정한 생활로 일관할 것을 강조하였다. 1632년 여름 치악산의 영은사로 옮겨 2년을 지내다가 나이 90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茶毘)한 뒤 사리 3과를 얻어서 금강산표훈사(表訓寺)와 지제산(持提山)천관사(天冠寺), 성오산 향림사(香林寺) 등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도일(道一) · 밀운(密雲) · 홍택(洪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제월당집』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