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오씨(吳氏), 호는 무용(無用). 8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읽었으며, 13세에 부모가 죽자 형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19세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로 출가하여 혜관(惠寬)의 제자가 되었고, 혜공(慧空)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불경을 공부하다가 1673년(현종 14)에 마음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 참선과 교리의 연구에 있음을 느끼고 참선수행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선암사(仙巖寺)의 침굉 현변(枕肱懸辯)을 찾아가서 선의 진수를 물어 대오(大悟)하였다. 침굉의 인가를 얻은 다음 1년 동안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여 수행하였고, 1676년(숙종 2)에 침굉과 함께 조계산 은적암(隱寂庵)의 백암 성총(栢庵性聰)을 찾아가서 다시 깨달음을 인정받았다.
그때부터 수년 동안 불경을 열람하다가 신불암(新佛庵)·선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특히 팔영산(八影山) 제칠봉(第七峯) 밑에 초암을 짓고 고행하면서 선정(禪定)을 닦았다.
1688년에 다시 백암을 찾아가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공부하였고, 1689년 봄에는 백암을 도와 『화엄경소연의초(華嚴經疏演義鈔)』·『금강경간정기(金剛經刊定記)』·『정토보서(淨土寶書)』 등의 간행에 동참하였다. 1692년에는 선암사에서 화엄회(華嚴會)를 열었으며, 1700년 7월에는 백암의 뒤를 이어 조실(祖室)이 되었다.
그 뒤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704년에는 용문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겨 스스로 경작하고 추수하면서 수도하였다. 그 때 호남과 영남의 승려 300여 명이 『화엄경』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의 강의를 청하므로 이에 응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아미타불 염불에 전념하다가 나이 68세, 승랍 51세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다비(茶毘)한 뒤 유골을 모아 부도를 세웠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무용집(無用集)』 3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