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여충(麗忠), 속명은 중헐(中歇)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변재가 있었다. 묘향산에서 승려가 된 후 불법을 닦았다.
청(淸)이 일어나 명(明)과 싸울 때에 강동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 도독(都督)인 심세괴(沈世魁)의 휘하에 있었으며, 심세괴가 죽은 뒤에는 좌도독(左都督)인 홍승주(洪承疇)의 밑에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북경(北京)을 침범하려 할 때 적정을 정탐하다 압록강 근처에서 우리 군대에 붙들려 절도사 임경업(林慶業)에게 이송되었다가 최명길(崔鳴吉)에게 압송되었다.
때마침 병자호란이 일어나 명나라에 소식을 전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1639년(인조 17)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한양(漢陽)이 함락되었음을 알렸다. 이때 명나라 황제로부터 여충이라는 호를 받았다.
1642년에 본국에 돌아와 많은 상품을 받은 뒤 다시 홍승주의 휘하에 들어갔다.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 다시 임경업의 휘하에서 명나라 등주(登州) 등을 내왕하며 연락하였고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임경업과 함께 북경으로 잡혀 가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후 본국에 돌아왔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울산(蔚山)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