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보문사 ( )

불교
유적
조선 후기부터 기록에 보이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道峰山) 우이암(牛耳巖)에 있는 사찰.
이칭
이칭
원통사(圓通寺), 원통암(圓通庵), 보은사(報恩寺)
유적/건물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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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보문사는 조선 후기부터 기록에 보이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道峰山) 우이암(牛耳巖)에 있는 사찰이다. 1810년 청화가 중창하였으며, 1887년 한규가 법당을 수리하였다. 1928년 비구니 자현이 중창을 발원하며 천일관음기도를 시작하였고, 1931년에 천일기도가 끝나자, 다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부터 기록에 보이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道峰山) 우이암(牛耳巖)에 있는 사찰.
역사적 변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찰이다. 사찰명이 원통사(圓通寺), 원통암(圓通庵), 보은사(報恩寺)로도 기록되어 있다. 보문사의 창건 및 주1과 관련하여 조선 후기 홍양호(1724~1802)『이계집(耳溪集)』 「보은사중수기(報恩寺重修記)」에서는 원통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백여 년 동안 퇴락하자, 유인(宥牣) 등 여러 승려들이 새로 주2 사찰명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1887년(고종 24)에 찬술된 「원통암대법당사중수상량문(圓通庵大法堂四重修上樑文)」에서는 864년(경문왕 4) 도선(道詵)이 창건하고, 1053년(문종 7) 관월(觀月)이 중창했으며, 1392년(태조 1) 천은(天隱)이 다시 중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량문의 이러한 기록은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1810년(순조 10) 청화(淸和)가 중창하였으며, 1887년(고종 24) 응허 한규(應虛漢奎)가 법당을 수리하였다. 1928년 비구니 자현(慈賢)이 사찰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있는 춘성(春城)을 청하여 천일관음기도를 시작하였고, 1929년 불전을 신축하는 한편, 주3을 청하여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931년에 천일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지리산의 보응과 함께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였다. 그 뒤 1933년에 칠성각을, 1936년에는 법당 일부와 대방(大房)을 중수하였다. 이때 사찰명을 원통사에서 ‘보문사’로 바꾸었다. 1938년에는 독성각을 건립하였다. 현재는 사찰명을 다시 ‘원통사’로 바꾸었다.

현존하는 주4로는 법당인 대웅전약사전 · 삼성각 · 주5 등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이계집(耳溪集)』

단행본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이고운, 박설산, 『명산고찰 따라』 (우진관광문화사, 1982)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 (대한불교진흥원, 1994·1995)
주석
주1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 우리말샘

주2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3

보배롭고 귀중한 거울. 우리말샘

주4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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