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송광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소조 권속상 일괄 ( )

완주 송광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완주 송광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조각
유물
문화재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1640년에 제작된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이칭
이칭
완주 송광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전라북도
종목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1999년 04월 23일 지정)
소재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1640년에 제작된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개설

1999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석가여래(본존) 172㎝, 무독귀왕(좌) 194㎝, 도명존자(우) 181㎝. 송광사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권속 등으로, 내부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어 1640년이라는 제작 시기가 밝혀졌다. 목조로 제작된 지장보살상을 제외한 나머지 존상들은 모두 소조로 조성된 것이 조사에서 밝혀졌다.

내용 및 특징

송광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삼존상, 시왕상 10구, 동자상 8구, 귀왕 및 판관상 6구, 장군상 2구로 구성된 총 31구의 상이 벽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1993년에 지장보살좌상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어 명부전 권속들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발원문에 의하면 명부전 존상들은 승명(勝明)이 주도하여 1640년에 조성되었다. 명부전 화주(化主) 승명은 송광사를 중창한 6명의 승려 중의 한 명이자, 1641년 대웅전 소조삼세불좌상의 불상대화사(佛像大化士)로도 이름이 나와 송광사의 중창에 꾸준히 관여를 했던 승려임을 알 수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긴 장대한 체구를 보인다. 지장보살좌상은 오른쪽 팔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왼팔은 복부 앞에 두고 있다. 따로 제작된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결하고 있다. 지장보살좌상의 두상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상호는 눈초리가 올라간 눈, 높게 솟은 코, 좁은 인중과 양 끝이 살짝 올라간 입술로 구성되고, 목 아래에는 완만한 삼도가 새겨져 있다. 특히 양미간에서 코끝까지 곧게 내려오는 코로 인해 이목구비가 명확하게 보인다. 지장보살좌상은 승각기, 편삼, 대의를 걸친 전형적인 조선 후기 착의법을 따르며 주름은 깊은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한다. 무독귀왕은 정면에 보상화문이 있는 원류관 형태의 관모를 쓰고 있으며 턱이 긴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무독귀왕은 양손을 비단으로 감싼 채 경궤(經机)를 들고 있다. 무독귀왕의 가늘게 뜬 눈과 전반적인 이목구비와 전신을 덮는 단령포, 의대, 수직으로 흘러내린 광다회와 세조대를 걸친 모습은 시왕상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젊은 비구 형상의 도명존자는 장삼과 법의를 걸치며 양손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며 전반적인 이목구비는 지장보살좌상 보다 좀 더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10구의 대왕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자세가 없다. 진광대왕, 초강대왕, 염라대왕, 오관대왕은 모두 홀을 쥔 모습이지만 세부적인 손의 형태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진광대왕과 초강대왕은 오른손이 왼손을 덮으며 홀을 쥐지만, 염라대왕과 오도전륜대왕은 한 손을 다른 손 위에 살짝 올린 채 홀을 쥔다. 홀을 쥐지 않는 태산대왕은 반가좌를 하고 수염을 쓰다듬는 자세이고, 도시대왕은 암석을 밟은 채 무릎 위에 오른손을 뻗고 있다. 변성대왕은 의대를 쥐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고, 평등대왕은 오른손으로 관모를 살짝 쓰다듬는 모습이다.

송광사 시왕상의 표정은 섬세하고 다양하다. 도시대왕은 눈썹 부위와 미간의 주름을 강조해서 험상궂은 표정인데 반하여 염라대왕과 평등대왕은 미소를 머금거나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밝은 표정이다. 시왕상의 관모는 대부분 보상화문이 주요한 장식 모티프이지만, 오도전륜대왕의 경우 좌우에 깃털 장식이 추가 되고, 염라대왕의 관모 정상부에는 금강경이 놓여 있다. 도시대왕과 변성대왕의 관모는 천으로 덮여 있다. 이러한 관모 형태는 1640년대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1680년대 이후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단응 집단이 조성한 1684년 예천 용문사 시왕상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하부 권속으로는 귀왕 2구, 판관 4구, 사자 2구, 동자 8구와 인왕 2구가 남아 있다. 좌우 귀왕상은 동일하게 홀을 쥐고 있으나 원류관을 쓴 우측 귀왕과 달리 좌측 귀왕은 두건을 쓰고 있다. 복두를 쓴 두 판관은 양쪽으로 2구씩 총 4구가 있다. 판관은 귀왕과 유사한 크기와 동자들과 비슷한 크기로 나눌 수 있다. 판관들의 크기를 달리하여 조성한 것은 판관들 사이에서도 계위를 두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두건을 쓴 사자상과 분노형으로 표현되어 금강저를 쥐고 천의를 두른 장군상은 각각 좌우에 한 구씩 있다. 동자상은 총 8구가 남아 있다. 동자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서수, 책판, 책, 과일과 같은 지물들과 동물들을 안고 있다.

의의와 평가

1640년에 조성된 완주 송광사 명부전 존상들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조선 후기 명부전 존상들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예이다. 따라서 17세기 초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조성되는 명부전 존상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기록문화재 자료집』Ⅱ((사)한국미술사연구소, 2012)
「송광사 명부전의 도상연구」(김정희, 『강좌미술사』13, 한국불교미술사학회, 1999)
집필자
조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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