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4.2m. 199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조각상이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649(인조 27)년 이전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행해진 일련의 사찰 재건 사업에서 당시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벽암각성 대사(碧巖覺性大師)가 주도한 장인 계열을 중심으로 제작하였던 승주 송광사, 화엄사와 더불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세 사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벽암 문도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점에서 사천왕의 호국 · 호법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 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재질이 소조이기 때문인지 얼굴의 주름살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활달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분노상이 잘 드러난 얼굴 표정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다. 4위(位) 모두 한쪽 다리는 악귀가 받들고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수직으로 내리고 있다.
1994년 10월 사천왕상 개채 보수 작업 중에 보탑을 든 사천왕상의 보관 끈 뒷면과, 왼손에 받쳐 든 보탑의 밑바닥에서 묵서의 명문이 발견되었고, 여러 점의 복장품들이 나왔다.
보관 끈에는 “順治乙丑年十月日畢金山畵面主造?爲?(순치을축년시월일필금산화면주조?위?”라고 씌어 있었다. 송광사 개창비에는 숭정(崇正) 병자(丙子)년에 법당과 동서 재료(齋寮)를 완성하고 단청을 시채(施彩)하였으며 천왕전은 여인(呂仁)이라는 승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636년과 1649년 사이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보탑 밑바닥에는 건륭(建隆) 51년(1786)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복장품으로는 용, 보주를 든 사천왕상을 제외한 3위(位)의 천왕상의 등 부분 속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류와 후령통 등이 나왔다. 경전류로는 정강(靖康) 정미(丁未)년(1129)과 천계(天啓) 8년(1443)에 제작된 귀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