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년(숙종 16)에 제작되었다. 198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높이 3.4m. 조선 후기의 목조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보림사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이래로 151년 동안 소조사천왕상들만 제작되어 오다가 적천사 사천왕상에 이르러 오랜만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특히 20년 뒤에 제작된 쌍계사의 목조사천왕상이 적천사 상의 계통을 철저히 따르고 있어 조선 후기 목조사천왕상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보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고 판단된다.
평면적인 이마에서 눈썹이 급작스럽게 윤곽을 만들면서 솟아 오른 점이라든가, 주먹코이면서도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형상, 또는 목주름의 울퉁불퉁하고도 규칙적으로 표현된 기법 등이 쌍계사 상들과 흡사하다.
목조인 까닭에 여러 조각의 나무를 잇대어 만든 흔적이 뚜렷한 적천사 상들은 4위 모두 몸체 부분이 일정한 틀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슴 주변의 옷주름이라든가 갑옷의 형태 그리고 몸통의 입체감 등이 거의 동일하게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4위 모두의 어깨의 구부러진 각도, 목수건의 형태,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을 내린 각도 또한 거의 일정하다는 점 등은 하나의 기본 틀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198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악귀는 모두 3구였다. 1981년에 윤용진 교수가 적천사 사천왕상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악귀가 모두 8구였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6월 20일 천왕문 보수 중에 사천왕상 안에서 사리 3과(果), 경전 80여 판(板), 의류(장삼 두루마기) 23점 및 다라니경판 찍은 것이 다량으로 나왔다.
복장기에 의해 적천사 사천왕상의 조성 연대가 밝혀졌으며 여기에는 7백여 명의 승려의 이름과 신도 4백 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복장기에는 “康熙二十九年庚午7月淸道郡地南領華岳山積川寺四天王造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