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본산 제도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석왕사의 창건이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이능화(李能和)는 다만 숭불호법(崇佛護法)을 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는 1377년(우왕 3)에 이성계가 정몽주(鄭夢周)·이화(李和) 등과 함께 청주(淸州: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에 갔을 때 해양(海陽: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광적사(廣積寺)가 병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대장경(大藏經) 1부와 불상 및 법기(法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남운(金南運)을 보내 이들을 보완한 뒤 석왕사에 봉안하고, 오랫동안 임금을 축수(祝壽)하고 나라의 복을 빌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석왕사에서 가까운 설봉산 귀주사(歸州寺)에서 독서를 하고 지낸 사실과 이성계와 무학에 얽힌 설화 등으로 미루어 석왕사의 창건은 이성계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성계가 석왕사로 대장경을 옮긴 1377년 이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應眞殿)을 세워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天眞堂)·진헐당(眞歇堂)·인지료(仁智寮)·용비루(龍飛樓) 등을 지었다. 왕이 된 뒤에는 거찰(巨刹)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洞口)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 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暎月樓)·흥복루(興福樓)·범종루(梵鐘樓)·용비루(龍飛樓)·조계문(曹溪門) 등을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웅전·응진전·팔상전·명부전·해장전(海藏殿)·극락전·석왕사(釋王寺)·인지료·신한각(辰翰閣)·운한각(雲漢閣)·천서각(天書閣)·만춘각(萬春閣)·백련당(白蓮堂)·진헐당·심검당(尋劍堂)·수군당(壽君堂)·보명전(普明殿)·연빈관(延賓館)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