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사(禪源寺)는 1232년에 인천광역시 강화도로 천도한 뒤, 집정자였던 최우가 1245년에 자신의 원찰로 창건한 사찰이다. 1236년에 재조대장경 판각이 시작되었고, 선원사는 대장도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장경을 봉안,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1398년(태조 7)에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진 후 별다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폐사 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실정이다. 1977년에 지금의 선원사지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그 위치를 비정하는 데 이견이 많다.
선원사(禪源寺)는 무신 집권기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당시 집정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로 창건한 곳이다. 창건 시기는 1245년이다. 이후 선원사(禪源社)에는 최우의 주1이 안치되었다.
1236년에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판각이 시작되었는데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재조대장경을 봉안 및 관리하기 위해 선원사가 세워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대장도감의 본사(本司)가 강화도에 있었고 승려들이 경판을 필사하고 조각하였다는 점 등을 통하여 경판을 보관하였던 이 절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무인 집권기 사상계의 중요한 변화로 지눌이 주도한 주2를 들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절이 수선사(修禪社)였으므로 그 사주는 당시 고려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로도 볼 수 있는데, 통상 선원사의 주지가 수선사의 주지가 되었다. 예컨대 진명국사(眞明國師), 원오국사(圓悟國師), 자오국사(慈悟國師), 원명국사(圓明國師) 등이 임명된 사실이 전한다. 선원사는 수선사와 더불어 제2총림으로 불렸다.
개경 환도 후에는 충렬왕이 병란을 피해 선원사로 거처하는 곳을 옮긴 적이 있고 또 실록을 이곳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원사는 1398년(태조 7)에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진 후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 이후 별다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폐사 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실정이다. 또한 선원사의 위치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1977년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692-1번지와 그 일대 지역이 사적 제259호 선원사지로 지정되어 1996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를 전후로 현재의 터를 신니동 가궐지라고 하고 다른 지역을 선원사 터로 주4 견해들이 제출되었다. 충렬사(忠烈祠) 전면 터 혹은 그 주변 지역을 선원사 터로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