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天英, 1215~1286)은 법명(法名)이며, 안기(安其), 안차(安且)라 고쳤으며, 자(字)는 내로(乃老), 자호는 회당노인(晦堂老人), 자인실노인(慈忍室老人)이다. 호는 충경(冲鏡)이고, 시호는 자진원오(慈眞圓悟)이며. 단공(旦公)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속성은 양씨(梁氏)이며, 아버지는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의 토성(土姓)인 양택춘(梁宅椿), 어머니는 황해도 서흥 출신의 김씨이다.
천영은 1229년(고종 16)에 15세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1233년에 19세로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좌원(座元)이 되었으며, 1236년에 승과에 응시해 상상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수선사 3세인 청진국사 몽여(淸眞國師夢如)의 가르침을 받았고, 4세인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混元)을 스승으로 삼았다.
1246년(고종 33) 천영은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248년 34세가 되던 해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1249년에는 최우가 창건한 창복사(昌福寺)의 주맹(主盟)이 되었으며, 선원사의 주지가 되었다. 1251년 최항은 보제사(普濟寺) 별원을 건립한 후 천영에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승들을 모은 법회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1252년 천영은 선원사의 법주(法主)가 되었다. 1256년 42세가 되던 해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진명국사 혼원이 은퇴하면서 수선사의 법주가 되었다. 1259년 원종이 즉위한 후에 천영을 왕사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천영의 왕사 책봉 실패는 당시 수선사를 후원하던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수선사가 퇴조하던 흐름을 보여준다. 천영은 1286년(충렬왕 12) 72세로 불대사(佛臺寺)에서 입적하였다.
문하의 제자로 굉묵(宏默), 충지(冲止), 명우(明友), 굉소(宏紹), 신화(神化), 신정(神定), 만항(萬恒) 등이 있다.
천영의 생애와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최씨 정권과의 관계이다. 최우는 창복사(昌福寺)를 창건하고 천영에게 낙성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몽여가 입적하자 선원사 법주로 있던 혼원을 수선사의 사주로 임명하고, 그를 선원사 2세 법주로 삼았다. 선원사와 창복사는 최우가 세운 원찰이며, 최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몽항쟁기 항몽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사원이었다. 이와 같은 천영과 최씨 정권의 두터운 관계는 천영의 아버지와 이복동생이 문음(門蔭)의 혜택을 입고 노비를 하사받았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버지 양택춘은 비실직품관(非實職品官)이었는데, 아들인 천영이 유명해지면서 60세에 온수군(溫水郡) 감무라는 실직을 받았고,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천영의 형제 3명도 모두 천영으로 인해 문음(門蔭)의 혜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