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수선사(修禪社) 제10세 국사이다.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웅진(熊津). 아버지는 진사 경승(景升)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며, 구산선(九山選)에 응시하여 장원에 뽑혔으나 명리(名利)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지리산으로 옮겨 한 벌의 옷만을 갖추고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면서 눕지도 않고 수도에 전념하였다.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충렬왕은 삼장사(三藏社)에 머물기를 명하였고, 스승인 자진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 천영도 권고하므로 삼장사에 부임하였다.
뒤에 낭월사(朗月社)·운흥사(雲興社)·선원사(禪源社)의 사주(社主)를 역임하면서 경문(經文)을 지도하고 교수하였는데, 제자가 700인에 이르렀고 사대부로서 제자가 되어 입사(入社)한 자도 많았다.
또한, 원나라의 화상 몽산덕이(蒙山德異)는 만항의 글과 게송(偈頌)을 보고 칭찬하여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주었으며, 수십 차례 서간과 게송을 주고받았다. 1313년(충선왕 5) 왕이 영안궁(永安宮)에 고승들을 모아 날마다 불법을 강론하게 하였을 때, 그를 극진한 정성으로 초빙하여 선법(禪法)을 강설하게 하자 선교의 명승들이 수없이 모였다.
바른 것을 받들어 찬양하고 잘못을 꾸짖는 것이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그 변론은 물이 쏟아지는 듯하였다고 한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수레로 그를 모시고 만찬을 손수 받들었으며, ‘별전종주중속조등묘명존자(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라는 법호를 주고 가사와 의복, 은(銀) 50근을 보시하였으나 송광사로 돌아와 모두 절에다 내놓았다.
1319년 7월에 병을 얻어 8월 18일 대중을 모은 뒤 선상(禪床)에 올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미소하며 입적하였다. 이 때 나이는 71세, 법랍은 58세였다. 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애도하여 혜감국사(慧鑑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塔號)를 광조(廣照)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