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맥은 선종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리킨다. 선종에서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스승은 선법의 진수를 전할 참된 제자를 구하는 것을 큰 임무로 여겼다. 중국의 선종 법맥은 제1조 보리달마부터 제6조 혜능까지 이어진 뒤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우리나라의 선종 법맥은 혜능을 이어 남악-마조-지장으로 이어졌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은 지장의 법맥을 이어서 도의가 개산하였고, 실상산문은 지장의 법맥을 이어 홍척이 개산하였다. 동리산문은 지장의 법맥을 이어 혜철이 개산하였다.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혈통을 밝히고 있듯이, 선종에서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으며, 이와 같은 법통의 전승을 법맥이라고 하였다. 인도의 경우에는 이 법맥이 석가모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누구의 법맥을 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됨에 따라 과거칠불설(過去七佛說)과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칠불은 지난 세상에 출현한 일곱 부처님으로서, 비바시불(毘婆尸佛)을 시작으로 하여 제2 시기불(尸棄佛), 제3 비사부불(毘舍浮佛), 제4 구류손불(俱留孫佛), 제5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제6 가섭불(迦葉佛), 제7 석가모니불로서, 이들의 법맥이 차례로 이어져 석가모니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진귀조사설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고 7일 동안 보임(保任)을 하였는데, 그때까지 석가모니는 여래선지(如來禪旨)를 증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7일이 지난 뒤 석가모니는 우연히 총림방(叢林房)을 지나다가 한 성자를 만났다. 그때 성자는 석가모니를 기다린 지 오래임을 밝히고 과거칠불 가운데 여섯번째인 가섭불로부터 위촉받은 여래밀인(如來密印)을 전하여 주고, 또 조사선지(祖師禪旨)를 깨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진귀조사설은 중국의 선종에 널리 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하고 최초로 선종을 들여온 범일(梵日)에 의해 전하여졌다. 즉, 과거칠불과 진귀조사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단독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오랜 옛적부터 내려오는 조사선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법맥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이후로는 인도에서 28조가 차례로 배출되었다. 그 법맥은 석가모니불-① 마하가섭(摩訶迦葉)-② 아난(阿難)-③ 상나화수(商那和修)-④ 우바국다(優婆국多)-⑤ 제다가(提多迦)-⑥ 미차가(彌遮迦)-⑦ 바수밀(婆須密)-⑧ 불타난제(佛馱難提)-⑨ 복태밀다(伏馱密多)-⑩ 협(脇)-⑪ 부나야사(富那夜奢)-⑫ 마명(馬鳴)-⑬ 가비마라(迦毗摩羅)-⑭ 용수(龍樹)-⑮ 가나제바(迦那提婆)- 라후라다(羅睺羅多)- 승가난제(僧伽難提)- 가야사다(伽耶舍多)- 구마라다(鳩摩羅多)- 사야다(闍耶多)- 바수반두(婆修盤頭)- 마노라(摩拏羅)- 학륵나(鶴勒那)- 사자(師子)- 바사사다(婆舍斯多)- 불여밀다(不如密多)- 반야다라(般若多羅)- 보리달마(菩提達磨)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십팔조설(二十八祖說)은 북위시대(北魏時代)에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가 함께 찬술한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에 의거한 것이며, 이것이 후대에 불조법통으로 확정되었다. 이와 같은 인도의 선종법맥은 제28조 보리달마가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함에 따라 널리 전승되었는데, 중국에서도 인도와 같이 초기에는 한 제자에게만 밀인(密印)을 전하여 제6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보리달마를 제1조로 한 중국의 법맥은 제2조 혜가(慧可), 제3조 승찬(僧璨), 제4조 도신(道信), 제5조 홍인(弘忍), 제6조 혜능(慧能)에까지 이어진 뒤, 혜능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선종이 널리 전승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우리 나라의 선종법맥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6조 혜능의 법맥을 이어받고 있다. 다만 신라의 법랑(法朗)은 4조 도신의 법맥을 이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서는 희양산문(曦陽山門)만이 일부 북종선(北宗禪)에 속하는 신수(神秀)의 법맥을 잇고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남악(南嶽)과 청원(靑原)에게 이어졌고, 남악의 법은 마조(馬祖)에게로 이어졌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은 신라의 도의(道義)가 마조의 제자인 지장(智藏)의 법맥을 이어서 개산(開山)하였고, 실상산문(實相山門)은 홍척(洪陟)이 지장의 법맥을 이어 개산하였으며, 동리산문(桐裏山門)은 혜철(惠哲)이 지장의 법맥을 이어 개산한 문파이다.
또 성주산문(聖住山門)은 무염(無染)이 마조의 제자인 보철(寶徹)의 법맥을 이어 개산하였고, 사자산문(師子山門)은 도윤(道允)이 마조의 제자인 보원(普原)의 법맥을 이어서 개산하였으며, 봉림산문(鳳林山門)은 현욱(玄昱)이 마조의 제자인 회휘(懷暉)의 법맥을 이어 개산하였다. 또한 사굴산문(闍崛山門)은 범일이 마조의 제자인 제안(齊安)의 법맥을 이어 개산한 종파이다.
희양산문은 신수-지공(志空)으로 이어지는 북종선의 법맥을 이은 신라의 신행(神行)이 다시 준범(遵範)-혜은(惠隱)의 순으로 전한 법맥과, 마조-신감(神鑑)- 혜소(慧昭, 신라승)로 이어지는 법맥을 함께 전승한 도헌(道憲)에 의해서 개산된 종파이다. 또한 수미산문(須彌山門)은 청원-석두(石頭)-약산(藥山)-운암(雲巖)-동산(洞山)-운거(雲居)로 이어지는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법맥을 신라의 이엄(利嚴)이 전승하여 개산한 종파이다.
이들 구산선문과 그 밖의 신라 및 고려 고승들의 법맥을 보면 [그림]과 같다.
우리 나라의 법맥에 있어서 크게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누가 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이것은 조선시대불교의 최고고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고려 말의 고승인 보우(普愚)와 나옹(懶翁) 가운데 누구의 법맥을 이었는가를 올바로 살펴볼 수 있는 사료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논쟁이다.
도안(道安)의 『불조종파도(佛祖宗派圖)』에 의하면, 중국 임제종의 개조 의현(義玄)의 18대 법손인 석옥(石屋)은 고려의 보우에게 법맥을 전하였고, 보우의 법맥은 혼수(混修)- 각운(覺雲)- 정심(正心)- 지엄(智嚴)- 영관(靈觀)-휴정의 순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휴정이 스스로 밝힌 기록에 의하여, 각운까지는 정확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으나 혼수에 대해서는 뚜렷한 근거가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 까닭은 조선 초기의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이를 규명할 수 있는 뚜렷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사를 통하여 학자들 중에서는 다른 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즉, 문제가 되는 혼수는 보우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함께 있었던 사실이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옹에게서 법을 배우고 나옹이 관장한 공부선(工夫選)에 합격하여 나옹으로부터 가사와 상아불(象牙佛)을 신표로 받았다. 따라서, 혼수는 나옹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원승련사기(南原勝蓮寺記)」에 의하면, 각운은 연온(衍昷)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각운은 연온의 법맥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온이 중창한 승련사를 맡아 제2세 주지가 되었고 연온의 유촉까지 받은 고승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하여 보우-혼수-각운으로 이어지는 법맥은 성립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나옹-혼수-각운으로 이어지는 법맥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이는 이종익(李鍾益)의 주장으로, 그에 의하면 연온은 복구(復丘)의 법맥을 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정통선맥은 지눌(知訥)의 수선사(修禪社) 법맥을 따라야 하며,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직접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조차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중국의 임제종은 흥화(興化)-남원(南院)-풍혈(風穴)-수산(首山)-분양(汾陽)-자명(慈明)-양기(楊岐)-백운(白雲)-오조(五祖)-원오(圜悟)-대혜(大慧)로 이어지고, 대혜의 법맥을 사상적으로 전수한 고려의 지눌이 수선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법맥이 혜심(慧諶)- 몽여(夢如)- 혼원(混元)- 천영(天英)-정열(晶悅)-복구-연온-각운-정심-지엄-영관-휴정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법맥은 영관의 법맥을 이은 청허문(淸虛門)과 부휴문(浮休門)이 양대산맥을 이루었고, 이 두 문파에서 각각 여러 문파가 생겨나서 오늘날까지 그 법맥이 이어지고 있다. 법맥이란 곧 선법(禪法)의 진수를 제자에게 전하는 것으로서, 스승은 법맥을 전할 참된 제자를 구하여야만 그 임무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