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소(慧昭, 774~850)는 774년(혜공왕 10) 전주 금마(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혜소의 속성(俗姓)은 최 씨이며, 아버지는 창원(昌原), 어머니는 고 씨(顧氏)이다. 그는 6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금마 지역의 토호 출신으로 보인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혜소는 부모가 사망한 후인 804년(애장왕 5)에 세공사(歲貢使) 선편의 뱃사공이 되어 당에 유학하였다. 이후 혜소는 창주(滄州) 신감(神鑒)의 문하에서 인가(印可)를 받았고, 810년(헌덕왕 2)에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당에서 유학 중이었던 도의(道義)를 만나 그와 함께 여러 곳의 선 지식을 찾아 다녔다. 도의가 귀국한 후 혜소는 종남산에 들어가 3년 동안 지관(止觀)을 닦았고, 다시 3년 동안 짚신을 만들며 오가는 사람에게 보시(布施)하였다.
830년(흥덕왕 5) 혜소는 신라로 돌아온다. 귀국한 그는 상주 장백사(長栢寺)에 머물다가 삼법화상(三法和尙)이 머물렀던 지리산 화개곡에 절을 다시 세우고 그곳에서 지냈다. 838년(민애왕 1) 민애왕이 그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혜소는 왕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때 혜소는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힘쓰기만 하면 될 것이고 굳이 나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왕에게 답변하였다고 한다. 당시 민애왕은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혜소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정치적 · 사회적 혼란기였던 신라 하대의 집권층이 새롭게 대두한 선종에 정치적 · 사상적 지원을 기대하던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후 민애왕은 혜소에게 혜조(慧照)라는 호를 내리고 황룡사에 적을 올리게 하여 그를 후원하였다. 그후 혜소는 새로이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조계(曹溪) 육조(六祖)의 영당(影堂)을 세웠다. 혜소가 육조의 영당을 건립한 것은 선종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혜소는 850(문성왕 12)년에 입적하였다. 886년 헌강왕이 그에게 시호를 진감(眞鑑)으로, 탑호(塔號)를 대공영(大空靈)으로 내려 그를 추증(追贈)하였다.
혜소는 자신의 문하에서 하나의 선문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의 비문(碑文)에 희양산문(曦陽山門)의 지증대사 도헌(道憲)이 자신의 법계를 고쳐 혜소의 법맥을 이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혜소의 영향이 일정 정도 후대에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 외에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혜소가 가졌던 선 사상을 뚜렷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당에서 유학하던 혜소의 스승이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신감이므로 혜소 역시 마조선(馬祖禪)의 본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唐代) 선을 대표하는 마조 도일의 선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이며, '일상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마조는 '수행을 통해 미혹(迷惑)한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이기 때문에 수행이 필요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일상의 모든 행위가 불성이 드러난 것[作用卽性]'이라는 관점이다. 이와 같이 수행이 필요 없고,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고 방식은 '현실의 모습 그대로를 이상적 상태로 간주하는 평상무사(平常無事)'의 사상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마조선의 핵심 사상은 마조 도일 문하의 선승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대부분이 이러한 마조선을 계승하였다. 혜소의 비문에 그의 청빈한 일상 생활이나 누구든지 평등하게 대한 그의 자세 등이 주로 서술된 것은 혜소의 선이 지향했던 바가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혜소는 당에 유학하여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를 도입하였고, 중국의 차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가 수용한 범패는 종래 신라에서 향유하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갈래의 음악이었다. 이는 혜소가 범패라는 불교 음악을 통해 대중 교화를 실행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