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신라시대에 지방민들이 창건하여 복을 기원하는 절로 삼았다. 그러나 고려 초기부터 사세가 기울어 승려 몇 사람이 명맥만을 이어오던 것을 1174년(명종 4) 6월에 김영의(金令義)가 중창을 시작하여 1177년 7월에 완공하였다.
이 때 김영의는 절의 중창과 함께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봉안하였고, 불감(佛龕)·화과(花菓)·당번(幢幡) 등의 법당 장엄구와 범종·경(磬) 등도 갖추었다. 중창 이후 그는 나라에 보고하기를, “절에 식량 1,500석을 저축하여주면, 자모법(子母法)에 의하여 해마다 그 이식을 받아서 공양(供養)에 충당하고, 고승 15명을 선택하여 법연(法筵)을 베풀 것을 약속한다.”고 하여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낙성식 때에는 왕명을 받은 주(州)와 목(牧)의 관원이 함께 참석하였다. 그러나 중창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폐사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