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은 8세기 후반에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들의 문도들이 번창하면서 점차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선종의 수행자는 각지를 다니면서 몇 사람의 스승에게 배웠으며, 인가를 받은 후에도 선지식을 계속해서 찾는 경우가 많았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제 관계 인식을 달리 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등사서(傳燈史書)가 편찬되면서 선승을 배타적으로 한 사람의 스승에 연결하는 경향이 확대되었고, 선종 특유의 법통설에 입각한 법계의식이 고양되었고, 어느 사원이 특정 일파에 의해 계승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다.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 백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수미산문(須彌山門)은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이 932년(태조 15)에 해주의 수미산에서 고려 태조의 후원으로 광조사(廣照寺)를 창건하면서 이루어진 산문이다.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장 늦게 개창되었다.
개창조인 이엄은 12세에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고, 처음에는 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896년(진성여왕 10)에 당에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계열인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고, 이후 각지를 순례하다가 911년(효공왕 15)에 신라에 돌아왔다. 이엄은 귀국 후 호족 소율희(蘇律熙)의 후원을 받으며 김해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후삼국의 쟁패전이 격화되면서 김해를 떠나 북으로 상주, 영동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이엄은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게 되어 개경으로 갔다. 그는 개경의 사나내원(舍那內院) 주지로 머물다가 932년에 왕건의 명으로 해주(海州)에 광조사를 짓고 주석하였다. 수미산문은 고려 태조뿐만 아니라 해주 지역의 대호족인 황보씨 세력, 박수문(朴守文)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광조사에 딸린 토지는 관장(官莊)을 이루었고, 규모가 거대하여 세 곳에 장원을 설치하여 경영하였다.
한편, 대경 여엄(大鏡麗嚴), 선각 형미(先覺逈微), 법경 경유(法鏡慶猶)는 이엄과 함께 사무외사(四無畏士)로 불리며, 공통적으로 운거 도응의 법맥을 계승하였는데, 이들 모두 태조의 후원을 받았다. 이엄의 제자로는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비(貞朏), 경숭(慶崇), 현조(玄照) 등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