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관(靈觀, 1485~1571)은 경상남도 진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1485년 7월 7일에 태어났다. 당호는 부용(芙蓉)이고, 호를 은암선자(隱庵禪子),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고도 했다.
영관은 1498년(연산군 4)에 집을 나와 덕이산(德異山)에서 고행선자(苦行禪子)에게 3년 동안 배우고 머리를 깎았다. 1501년 신총(信聰)에게 교학을 익히고 위봉(威鳳)으로부터 선을 연마하였다. 그 뒤 구천동에 들어가 초암을 짓고 9년 동안 머물렀는데, 자리에 눕지 않고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으면서 선과 교에 통달하였다. 1509년(중종 4) 용문산의 조우(祖愚)를 찾아가 선을 논하면서 『노자』와 『장자』를 섭렵하였고, 1514년 청평산 학매(學梅)와 현묘(玄妙)한 뜻을 문답하였다. 1519년 금강산 세존암(世尊庵)에서 조운(祖雲)과 함께 2년을 안거(安居)한 뒤 내원암(內院庵)에서 율시 한 수를 짓고 붓과 벼루를 태운 뒤 묵언정진하며 9년을 지냈다. 1530년 가을 30년 만에 고향을 찾아가 아버지와 옛 주인을 만난 뒤, 지리산의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찾아갔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 20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마음 속 의문을 풀었다.
3년 동안 지엄을 모시고 수행한 뒤 황룡산, 팔공산, 지리산 의신동(義信洞), 연곡동(燕谷洞) 등에서 40여 년 동안 후학을 지도하다가 나이 87세, 법랍 72세로 입적하였다. 제자 법융(法融) · 영응(靈應) · 대선(大禪) 등 8인이 영골(靈骨)을 거두어서 연곡사(燕谷寺) 서쪽 기슭에 탑을 세웠다.
영관은 선과 교에 모두 정통하였고 유가와 노장에도 밝았다. 또한 칠요(七曜) · 구장(九章) · 천문(天文) · 의술(醫術) 등에 두루 통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조사(祖師)의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하여 시원하게 깨닫도록 이끌었다. 당시 많은 유생들이 배우러 왔는데, 이에 대해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은 『삼로행적(三老行蹟)』에서 “호남과 영남에서 유불도 3교에 통달한 속인들이 대사의 교화를 받았다.’라고 평가하였다.
17세기 전반에 성립된 임제태고법통(臨濟太古法統)은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臨濟宗)의 정통 법맥을 전수해 온 이래, 환암 혼수(幻庵混修)-구곡 각운(龜谷覺雲)-벽계 정심(碧溪淨心)-벽송 지엄(碧松智嚴)-부용 영관(芙蓉靈觀)을 거쳐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불교계는 청허계와 부휴계의 양대 계파가 주도하였기에 휴정과 선수의 스승인 부용 영관의 법맥 상 위치와 불교사적 위상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