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은 조씨(趙氏).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庵). 법명은 혼수(混修). 용주(龍州: 평안북도 용천) 출신. 아버지는 숙령(叔領)이다. 공민왕에게 불법을 전했으며, 계율을 굳게 지키고 선교(禪敎)의 모든 경전에 통달하였다.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에 아버지의 부임지에서 출생하였다.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대선사인 계송(繼松)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승과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고, 1348년(충목왕 4) 금강산에 들어가 2년 동안 정진하였다.
그 뒤, 선원사(禪源寺)의 식영암(息影庵)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웠고,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지은 휴휴암(休休庵)에서 3년 동안 『능엄경』을 강의하였으며, 충주 청룡사(靑龍寺) 서쪽에 연회암(宴晦庵)을 짓고 머물렀다.
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에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 신성암(神聖庵)에 머물렀다. 그 때 고운암(孤雲庵)에 있던 나옹(懶翁)과 자주 만났으며, 나옹으로부터 신표를 받았다.
1369년 김황(金璜)의 원찰(願刹)인 서운사(瑞雲寺)에서 선회(禪會)를 크게 열었고, 1370년 공부선장(功夫選場)에서 홀로 뽑혀 공민왕이 내원(內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나, 위봉산(圍鳳山)에 숨었다.
1372년 왕명으로 호불사(護佛寺)에, 이듬해에는 내불당(內佛堂)에 머물렀으나, 밤에 빠져나와 평해의 서산(西山)으로 갔다가 1374년 다시 내원에 들어가 공민왕에게 불법를 가르쳤고, 특히 왕대비의 존경을 받았다. 그 해 9월 우왕이 즉위,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의 호를 내렸다.
1375년(우왕 1) 송광사에 머무르고, 이듬해 서운사로 돌아갔다. 1378년 치악산에서 연회암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문사·청평사·치악산 등을 편력하였다.
1383년 4월 1일 왕이 어서·인장·법복·예폐(禮幣) 등을 연회암에 보내어 국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렸으며, 충청북도 충주의 개천사(開天寺)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1384년 해적이 충주를 침범하자 왕의 청에 의하여 광암사로 옮겼다. 다음 해 가을에는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의 주맹(主盟)이 되었으며, 1386년 보국사(輔國寺) 불정회(佛頂會) 및 수창궁(壽昌宮) 소재석(消災席)에 초청받아 주관하였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옮겨 머물다가,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표문을 올리고 치악산으로 돌아갔지만 몇 달만에 다시 국사에 봉하여져 개천사로 옮겼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1391년(공양왕 3) 서운사에 봉안하고 경회(慶會)를 베풀었다.
1392년(태조 1) 청룡사로 옮겼는데, 9월 18일 문인에게 유서를 쓰게 한 다음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경관(慶觀), 담원(湛圓), 소안(紹安), 만우(卍雨) 등이 있다.
태조가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충주 청룡사 터에 비와 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