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법화종(韓國佛敎法華宗)에 속한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며, 고려시대의 창건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도승(道僧)이 이 근처를 지날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급히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하는데, 공중에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다가 땅에 떨어뜨렸다. 한 마리의 용이 날쌔게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으며, 여의주는 큰 빛을 내다가 사라지고 용도 함께 사라졌으며 비도 멈추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세를 두루 살핀 도승은 그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吉地)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다는 것을 상기한 그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하였다 한다.
1392년(태조 1)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가 이곳에 은거하다가 입적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한 태조는 그곳에 대사찰을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 굴지의 명찰로 내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판서 민대룡(閔大龍)이 소실의 묘를 쓰려고 승려에게 많은 돈을 주고 불사르게 하였는데, 그 승려는 절을 불사르고 도망치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있는데, 원래 암자가 있던 곳으로 1665년(현종 6)에 중수하였고, 1921년에 혜종(惠宗)이 옛 당우를 뜯고 중건하였으며, 195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1996년에는 현우가 요사를, 1998년에는 법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가 있다. 그러나 옛 절터에는 1979년 국보로 지정된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같은 해 보물로 지정된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를 비롯하여 적운당사리탑(跡雲堂舍利塔)과 1692년(숙종 18)에 세운 청룡사위전비(靑龍寺位田碑)가 있다. 원래 정혜원 융탑 속에는 혼수의 유골을 비롯하여 옥촛대·금망아지·금잔 등이 있었으나 민족 항일기에 도굴 당하였다. 보각국사의 탑과 탑비·석등 등은 태조가 국사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