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진 장명등(長明燈: 능묘 앞에 설치한 석등)으로서, 고려시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방형등(方形燈)의 일종이다.
청룡사는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사찰로서 오량리 뒷산인 청룡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청룡사의 옛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절터 북쪽 골짜기에 석등 지대석과 함께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탑비(塔碑)만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석등은 본래 보각국사비와 정혜원융탑앞에 배례석과 함께 부도를 장엄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나 최근 대웅전 앞으로 이건하여 원래의 위치에는 현재 지대석만 남아 있다.
높이 203㎝인 이 석등은 현재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재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모든 부재가 네모난 데 비하여 하대석(下臺石)이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일명 사자석등이라고도 한다.
1매의 돌로 이루어진 네모난 지대석(地臺石)은 윗면에 사자를 안치하기 위하여 사자모양의 윤곽이 패어 있으며, 거북모양의 사자 1마리가 하대석 대신 놓여 있다. 툭 불거진 눈과 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놓고 있는 사자상은 울퉁불퉁한 근육과 함께 내딛고 있는 앞다리·뒷다리가 매우 힘있게 표현되었으며, 옆으로 비낀 꼬리 또한 유려하게 조각되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하여 구부리고 있는 사자의 등에는 초화문(草花文)이 정연하게 조식되어 있는 말안장모양의 네모난 장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중대석인 간주석(竿柱石)을 떠받들 수 있도록 1단의 네모꼴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역시 1매의 돌로 낮게 조성된 간주석의 네 면에는 亞자 모양의 안상(眼象)이 두 겹의 선으로 조식되어 있으며, 각 안상 내부에는 삼각형을 이루는 3개의 원형무늬와 함께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불꽃무늬[火焰文]가 선각되어 있다.
지대석과 같이 네모꼴을 한 상대석은 아랫부분에 1단의 각형 받침이 돌출되게 조각되었고 8엽의 복판앙련대(複瓣仰蓮臺)가 마련되어 있는데,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으로서 이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회암사지석등(檜巖寺址石燈) 앙련대와도 비교가 되는 것이다.
다른 부재와 마찬가지로 1매의 돌로써 만들어진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네 모서리에 둥근기둥모양[圓柱形]이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불을 넣는 화창(火窓)은 앞뒤로 2개만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석등에 보이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화창의 형태가 다른 석등에서와는 다르게 방형으로서 화창의 전후 좌우로 관통시켰으며, 네 기중에는 원형의 기둥주를 묘사했고, 화창의 밑부분에 창벽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화사석 위의 옥개석(屋蓋石) 역시 한 매의 네모난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밑부분에는 1단의 각형 받침과 함께 네 개의 서까래모양이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지붕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로 궁형(弓形)을 이루고 있다.
추녀 끝이 조금 치켜올라간 처마의 곡선은 약간 반전하고 있으며, 합각의 용마루는 둔하고 두꺼운 고려시대 승탑(僧塔)의 옥개석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륜부는 보주(寶珠)를 설치하였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결실되었다.
승탑·탑비와 더불어 일렬로 배치된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의 배치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1963년 지정)에서도 이와 같은 배치형태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석등은 탑비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인 1392년(태조 1)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 사이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석등으로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