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이 굴산사에서 사굴산파를 개창한 이후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에 사굴산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 834930),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 832916) 등 10명을 꼽고 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신라 말, 고려 초 사굴산파의 법맥이 이어져 나갔다. 행적과 개청 등의 활동으로 사굴산문의 영향력은 지역적으로도 확대되어 갔으며, 지방 세력뿐만 아니라 국왕과 중앙 지배층의 후원도 받았다.
범일 입적 후 범일비 건립을 주도한 제자가 개청으로, 그는 굴산사에 계속 머물다 명주 지장선원(知藏禪院), 즉 보현사(普賢寺)로 옮겨가 930년 보현사에서 입적했고, 940년 개청의 비석이 세워졌다. 행적은 범일에게서 출가한 후 당나라 유학을 떠났으나, 귀국한 후 다시 범일을 찾아왔으며, 범일이 병이 들자 굴산사로 돌아와 범일의 곁에 있었다. 그는 삭주(朔州)에 건자난야(建子蘭若)를 세우고 문도를 양성했고, 명요부인(明瑤夫人)의 요청으로 울산 석남산사(石南山寺)에 머물다 916년 입적했고, 954년(광종 5) 태자사(太子寺)에 비석이 세워졌다. 이 외에도 여철(如哲), 양경(讓景), 윤정(允正), 석초(釋超) 등이 활동하였다.
사굴산파는 고려 중기에도 주요 산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혜소국사(慧炤國師) 담진(曇眞)은 송에 유학가 임제선을 배워 왔고, 그의 제자인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은 송나라 임제 승려와 편지를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들은 예종과 인종대 왕사나 국사에 책봉되며 불교계를 이끌었다. 예종의 아들인 대선사 지인(之印)이 담진에게 출가하여 사굴산파에 속하였고, 탄연은 이자현(李資玄) 등에게 『능엄경(楞嚴經)』을 강의하며 새로운 선풍을 전했다. 담진의 손제자인 조응(祖應) 등은 용문사(龍門寺)를 중창하고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열기도 하는 등 12세기 사굴산파는 크게 부흥하였다.
무신정권기 사굴산파를 주도하던 담진계가 위축되는 대신, 사굴산파 안에서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며 새롭게 수선결사를 개창하였다. 수선사는 개창 초기에는 사굴산파에 대한 계승 인식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4세 사주인 혼원(混元) 이후가 되면 사굴산파의 계승을 표방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6세 사주인 충지(冲止)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4세기에 공민왕대에는 수선사 13세인 각진국사 복구(覺眞國師 復丘)가 왕사에 책봉되었다. 또한 고려 말 불교계를 이끌며 공민왕대 왕사에 책봉된 나옹혜근(懶翁惠勤)이나 우왕대 국사가 되었던 환암혼수(幻庵混脩) 등도 사굴산파 출신이었다.
신라 말 범일이 굴산사에 주석하며 산문을 개창한 이래 사굴산파에서 배출된 승려들은 다양한 선풍을 수용 및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굴산파는 한국 선종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였다. 사굴산파의 영향력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