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두운이 창건한 사찰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산에 있다. 두운이 이 산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고, 절을 짓기 시작했을 때 무게 16냥의 은병(銀甁) 하나를 캐어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983년(성종 2)에는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1171년(명종 1) 창기사, 1478년(성종 9) 성불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783년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이 있다.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는 2019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의하면,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절을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절을 짓기 시작했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 하나를 캐어 그것으로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군사를 거느리고 머문 적이 있었는데, 두운의 옛일을 생각하고 뒷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 태조는 936년(태조 19)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이 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英縺)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에게 법(法)을 전하였다.
조응은 이 절이 퇴락해 감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1165년(의종 19)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6년에는 의종의 칙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였고,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낮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는 의식을 항규(恒規)로 삼았다. 1179년 중건이 마무리되자 용문사에서는 선문구산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斷俗寺)의 선승(禪僧) 효순(孝惇)은 『전등록(傳燈錄)』 · 『능엄경(楞嚴經)』 · 『인악집(仁岳集)』 · 『설두집(雪竇集)』 · 『염송(拈頌)』 등을 강하도록 하였다.
그 전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대법회를 개설하였다.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 영치(穎緇)가 강을 맡았는데, 이 법회는 1180년에 시작하여 1182년까지 계속되었다. 1478년(성종 9) 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다시 절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1608년(선조 41)에는 혜명(慧明)이 제하당(霽霞堂)을 중수했고, 1636년(인조 14)에 학문(學文)이 적묵당(寂墨堂)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杜印)이 그 남쪽에 범종루를 지었다. 당시 그 밖에도 광명전(光明殿)이 세워졌다. 그뒤 1783년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悅坡) · 상민(尙敏) · 부열(富悅)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공사를 끝마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異蹟)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이 창건할 때 용이 영접한 것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의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舍利)를 봉안하는데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2019년 국보로 지정된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를 비롯하여 보광명전(普光明殿) · 응향각(凝香閣) · 진영각(眞影閣) · 명부전(冥府殿) · 응진전(應眞殿) · 회전문(廻轉門) · 범종루 · 강원 · 천불전(千佛殿) · 두운암(杜雲庵) 등이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1980년 보물로 지정된 예천 용문사 감역교지, 1684년(숙종 10)에 목각한 1989년 보물로 지정된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