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병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
이칭
속칭
활구(闊口)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101년(숙종 6) 6월
공포 시기
1101년(숙종 6) 6월
시행 시기
1101년(숙종 6) 6월
시행처
주전도감
주관 부서
주전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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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은병은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이다. 숙종이 1097년(숙종 2)에 주전관을 설치하며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시작하였고, 1101년(숙종 6)에는 기존에 칭량 화폐의 역할을 하던 은(銀)을 제도권으로 편입하여 은병에 표인하여 유통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 간섭기 원의 지폐 보초(寶鈔)가 유입되며 은이 대량 유출되자 1331년(충혜왕 1)에는 은병의 유통을 금지하고 새로이 소은병을 제작하여 유통하는 제도 변화를 시도하였다. 고려시대 주조된 금속 화폐 중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유통되었으며 고액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의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
제정 목적

고려 성종은 996년(성종 15)에 처음으로 철전(鐵錢)을 주조하고 유통하였다. 하지만 불과 6년 뒤인 1002년(목종 5)에 철전의 유통책은 철회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금속 화폐 주조는 시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과 물화 교역이 성행함에 따라 화폐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특히 숙종(肅宗)은 송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주전론(鑄錢論)에 귀를 기울였고, 금속 화폐 주조와 유통을 시도했다. 주전론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숙종의 동생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었다. 그는 1085년(선종 2) 4월에 밀항을 통해 송으로 유학을 갔고, 이후 송 황제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불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송의 문물을 배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송의 화폐와 은(銀)의 유통 상황을 목도하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형 숙종이 즉위하자 장문의 표(表)를 올려서 화폐의 유통을 주장하는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1097년(숙종 2)에 처음으로 주전관(鑄錢官)을 설치하였고, 그 뒤 1101년(숙종 6)에는 은병을 표인(標印), 주조해 유통하도록 하였다.

내용

숙종이 발행한 은병은 다른 금속 화폐와는 조금 다르다. 은병은 고려 내에서 이미 칭량 화폐로 유통되고 있던 것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여 발행한 것이다. 1097년에 처음 주전관을 설치하여 동전 주조를 시작했던 숙종은 1101년, 기존 시장에서 사사로이 유통되던 은병을 공식 화폐로 삼기 위해 모든 은병에 표인하여 법정 화폐로 유통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은병은 은 1근으로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떠 병(甁) 형태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반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병의 구멍은 작은 것이 보통이나 활구는 위가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은 1근에 해당하는 은병은 은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1근의 은병은 은 12냥 반, 동 2냥 반으로 총 15냥이었다. 16냥이 1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려 조정은 은병 주조를 통해 1냥당 약 3냥 반의 재정적 수입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제도 시행 이후 은병은 다양한 화폐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국가에서 개인에 대한 사여의 주요 물품이 되거나, 각종 재정 수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집을 사고팔 때 은병이 사용되는 등 교환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특히 송의 사신 서긍(徐兢) 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즉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시장에서 은병과 포(布)로 물건을 사고팔며, 잔액은 쌀(米)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은병이 화폐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중요한 점은 사료에서 물가를 표현하는 방식이 은병 유통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곡물과 포(布)의 교환 비율로 산정되는 물가가 은병과 쌀(米) 혹은 포(布)의 교환 비율로 계산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물가와 화폐 유통의 기준이 은병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은병 한 개의 교환 가치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의 물가 변화가 반영된 때문이었는데, 1132년(인종 10)에는 은병 1사(事)에 쌀 5석이었으나, 충렬왕 연간에는 적게는 15~19석, 많게는 50석까지 등귀한 적도 있었다. 공민왕 대 이후에는 물가를 표시할 때 더 이상 은병이 기준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원 간섭기 은의 유출로 은병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변천사항

숙종은 1097년 12월에 처음으로 주전관을 세우고 금속 화폐 유통을 선언하였다. 이후 1101년 4월에는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전(錢)을 사용하는 이로움을 나라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를 종묘에 고하자는 상서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칭량 화폐로 유통되던 은병에 표인을 하여 유통하는 은병 유통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동전과 은병의 유통이 본격화되자, 다음 해 12월에는 태묘(太廟)와 팔릉(八陵)에 이를 고하였고 백관의 하례를 받기도 했다. 숙종은 화폐 사용을 독려하기 위해 1102년(숙종 7) 12월에는 신료들에게 1만 5천관의 동전을 나눠 주기도 하였고, 동시에 개경 좌우에 주무(酒務), 즉 술집을 열기도 하였다. 또한 서경에는 화천별감(貨泉別監)을 두고 화폐 사용과 무역을 독려했으며, 1104년(숙종 9)에는 남경에 행차해 주점(酒店)과 식점(食店)을 열고 관전(官錢)을 하사하는 등 화폐 유통을 독려하였다.

이후 동전은 『고려도경』에 기록된 것처럼 약을 사고파는 곳 등 일부에서만 유통되는데 그쳤지만, 은병은 고액권 역할을 하며 지속적으로 유통되었다. 하지만 원 간섭기에는 원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유입되어 유통되었고, 은은 지속적으로 유출되며 은가가 등귀하게 되었다. 이에 충혜왕은 1331년(충혜왕 1) 4월에 소은병(小銀甁)을 제작하였는데, 교환 가치는 1개에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은병은 사용을 금지하여 소은병만 유통하게 하였다. 이렇게 소은병을 만들어 유통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은의 유출로 은병의 가치가 너무 오른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 말인 공민왕 대에 이르면 은병 제도가 완전히 무너졌다. 공민왕 대에는 새로운 화폐 제도인 은전(銀錢)의 발행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공양왕 대에는 지폐인 저화(楮貨) 발행이 시도되기도 했다. 또한 이 당시 물가 표현에서도 은병 대신 포(布)와 쌀(米)의 교환 가치로 표현되는 등 은병의 역할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의의 및 평가

고려는 고대와 달리 스스로 금속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그중에서도 은병은 당대 다른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로 고려 내부에서 칭량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던 것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여 운영한 것이었다. 은병제는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다. 소은병과 은전의 제작은 은병의 사용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화폐 유통의 경험은 후대에 또 다른 화폐가 유통될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기에 충분했으며, 그 처음으로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계림유사(鷄林類事)』

논문

김도연, 「고려시대 은화유통에 관한 일연구」(『한국사학보』 10, 고려사학회, 2001)
김도연, 「고려시대 화폐정책의 변화와 물가산정 방식」(『사총』 90,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7)
김도연, 『고려시대 화폐유통 연구』(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이경록, 「고려전기 은폐제도의 성립과 그 성격」(『한국사의 구조와 전개-하현강교수정년기념논총-』, 논총간행위원회, 200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도연(대구대학교 조교수,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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