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산문 ()

불교
단체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한 산문(山門).
단체
설립 시기
통일신라
설립자
도윤
설립지
쌍봉사
소재지
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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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자산문은 통일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 산문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선을 배우고 돌아온 도윤(道允)이 화순 쌍봉사에서 주석한 것을 계기로 사자산문이 시작되었으며, 제자인 절중(折中), 경유(慶猷) 등이 계승하며 고려시대 구산선문을 이루었다.

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한 산문(山門).
설립 배경

산문은 통일신라 말 중국에서 을 배운 신라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여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등장하였다. 선종은 중국에서 시작된 종파로, 8세기 후반에 마조도일(馬祖道一)과 석두희천(石頭希遷)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들의 문도들이 번창하면서 점차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선종의 수행자는 각지를 다니면서 몇 사람의 스승에게 배웠으며, 인가를 받은 후에도 선지식을 계속해서 찾는 경우가 많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제 관계 인식을 달리 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등사서(傳燈史書)가 편찬되면서 선승을 배타적으로 한 사람의 스승에 연결하는 경향이 확대되었고, 선종 특유의 법통설에 입각한 법계(法系) 의식이 고양되었다. 이에 어느 사원이 특정 일파에 의해 계승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다.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을 바탕으로 각각 세력을 이루고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 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변천 및 현황

사자산문(獅子山門)은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과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도윤은 출가하여 처음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선에 관심을 가져 28세 때인 825년(헌덕왕 17)에 당에 들어가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었다. 그는 당에서 일어난 회창 폐불로 인해 847년(문성왕 9)에 신라로 돌아왔다. 도윤은 금강산에 한동안 머물다가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는데, 이때에 화순의 쌍봉사(雙峯寺)로 옮겨 주석하였다. 이후 71세로 입적하였다. 도윤의 문하에는 징효 절중과 훈종장로(訓宗長老) 등이 있으며, 훈종장로의 문하에서 법경경유(法鏡慶猶)가 배출되었다.

절중은 15세에 부석사에서 출가해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19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절중은 도윤의 명성을 듣고 금강산 장담사(長潭寺)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도담선원(道譚禪院)에서 자인(慈忍) 선사의 문하로 16년간 수행하였다. 이후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사자산의 운예(雲乂) 선사의 청에 따라 흥녕선원(興寧禪院)에 머물렀다. 전란이 잇따르게 되자 절중은 상주와 음죽현 원향사(元香寺) 등을 옮겨 다니다가 스승 도윤이 머물렀던 쌍봉사로 갔다. 진성여왕이 절중에게 무량사(無量寺), 영신사(靈神寺)의 주지가 되어주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지방 세력가인 김사윤(金思尹)의 후원으로 동림사(桐林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강화도 은강선원(銀江禪院)으로 옮겼다가 입적하였다. 절중의 제자들이 그의 부도를 동림사에 건립하였으나 탑비는 미처 조성하지 못하였다. 그의 비는 입적한 후 44년이 지난 944년(혜종 원년)에 흥령사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건립에는 광종을 비롯하여 충주 유씨(劉氏)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로 참가하였다.

광종대 국사를 지낸 도봉산 영국사(寧國寺) 혜거(慧炬)는 고려 초 사자산문의 대두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 혜거는 출가 후, 절중의 제자인 도봉산 신정선사(神靖禪師)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혜거는 이후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의 가르침을 받다 귀국하여 국왕의 스승이 되었다. 한편, 혜거가 귀국한 뒤 950년 무렵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뒤 영국사로 찾아가 혜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0세기 전반 사자산문은 도윤-절중-신정-혜거-영준으로 이어지는 직계 계보를 형성하며 국사를 배출할 만큼 성장했으며, 고려 초 태조, 광종 등 역대 국왕의 귀의를 받았다. 특히 혜거나 영준이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을 배워온 점은 광종대 법안종 수용과 관련하여 사자산문의 역할을 주목하게 한다.

사자산문과 관련된 주요 사찰로는 화순 쌍봉사, 영월 흥령사, 도봉산 영국사, 합천 영암사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도윤을 개산조로 하는 사자산문은 944년 그의 제자 절중의 탑비 건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그리고 광종대 혜거가 국사로 책봉되고, 혜거와 그의 제자 영준이 중국에 유학을 떠나 법안종을 수학하고, 귀국 후에는 영국사가 법안종의 중심 사찰이 되는 등 광종대 법안종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도윤이 귀국한 이후 사자산문이 대두되는 일련의 과정은 9세기 선종 수용과 고려시대 구산문 성립의 문제에서 주목되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원전

『조당집(祖堂集)』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단행본

조범환, 『羅末麗初 禪宗山門 開創 硏究』(일조각, 2008)
추만호,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1992)

논문

최연식, 「고려초 道峯山 寧國寺 慧炬의 행적과 사상 경향 -신발견 塔碑片의 내용 검토를 중심으로-」(『한국중세사연구』 54, 한국중세사학회, 2018)
최연식, 「사자산선문의 성립과정에 대한 재검토」(『불교학연구』 21, 불교학연구회, 2008)
조범환, 「신라 하대 도윤선사와 사자산문의 개창」(『신라사학보』 10, 신라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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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주, 「신라 말 고려 초 사자산문과 정치세력」(『진단학보』 77, 진단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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