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오교구산(五敎九山) 중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중심사찰이다.
이 절은 원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으며, 사자산파의 중심사찰로 성장시킨 것은 개산조 도윤(道允)의 제자인 징효국사(澄曉國師)였다. 그 당시 헌강왕은 이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으나, 891년(진성여왕 4)에 병화로 회진되었다가 944년(혜종 1)에 중건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회진된 뒤로는 1,000년 가까이 폐사로 남아 있었다. 1902년 대원각(大圓覺)이 몽감(夢感)에 의하여 중건하였으나 1912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0년에 중건에 착공하였으나 다음해 홍수와 산사태로 법당 앞의 석탑이 떨어져나가고 구사지 일부가 유실되었다.
891년에 흥녕선원이 불타기 전에는 수많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 위세를 떨쳤는데, 그 때의 융성함을 입증하는 3개의 안내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守護石佛坐像)이 현존하고 있다. 사자산 심산유곡에 위치한 이 절을 찾아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세워진 안내탑 중 첫 번째 것은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에 있고, 두 번째 것은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 있으며, 세 번째 것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있다.
이 중 현사지에 있는 두 번째 석탑은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이 탑을 일제강점기 초기에 수로를 만들기 위하여 3m 가량 이동시킬 때 탑 밑에서 높이 66㎝의 동불상(銅佛像)이 출토되었는데, 일본관헌이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단 수호불상이라고 불리는 불상은 수주면 무릉리의 요선암(邀仙巖)에 조각되어 있는데, 높이 7m의 대불(大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