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금강사(金剛寺)’라 하였으며, 뛰어난 경관으로 고승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 16국사 중 한 사람인 정혜국사(淨慧國師)가 말년에 이곳에서 살았는데, 집이 낮고 누추하여 넓히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그의 제자 졸암(拙庵)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시주를 얻어, 중창 불사(佛事)를 시작한 지 36년 만인 1361년(공민왕 10)에 완공하여 절 이름을 승련사로 고쳤다.
이 때 불전(佛殿) · 승무(勝廡) · 선당(膳堂) · 선실(禪室) · 객실(客室) · 곳간 · 부엌 등 총 111칸의 당우를 갖추었고,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상을 불전 중앙에 봉안하였으며, 신도들의 시주로 대장경을 인출하여 불상 좌우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가 입적한 뒤 제자 각운(覺雲)이 주지를 맡아 완성되지 못한 외벽을 쌓았다고 하는데, 졸암과 각운이 주지로 있었던 시절에는 이 절에 200여인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사찰역사는 전혀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과 관련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절터가 있는 식련리는 승련사의 연꽃을 가져다가 심고 마을이름을 식련이라 불렀는데, 이 마을은 승련사의 승려들이 살던 사하촌(寺下村) 성격을 띠고 있었다.